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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un 28. 2022

아지노모토-맛의 과학

msg는 과연 나쁜가?-우마미의 발견

언젠가부터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 일명 MSG로 불리는 화 학조미료는 우리의 식탁에서 가장 친근한 조미료가 되었다. MSG가 만들어내는  맛은 우마미(umami taste)로 신맛, 단맛, 짠맛, 단맛이라는 4개의 기본 맛에 더해 져 5번째 기본 맛으로 인정된 맛이다.1) 하지만 2000년대의 웰빙 열풍 이후  MSG를 과대섭취하면 두통, 발열, 무력감을 넘어 비염, 천식, 알레르기, 발암  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논쟁으로 글루탐산은 가장 나쁜 식품첨가물 중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지만 라면을 비롯한 각종 인스턴트식품, 패스트푸드, 과자,  치킨, 편의점 도시락 등을 통해 우리는 거의 매일 MSG를 섭취하고 있다.  최근 음식을 주제로 하는 예능프로그램에서도 MSG가 음식의 맛을 내는 복잡 한 과정을 건너뛰어도 “그럴싸한”음식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가루’라고 부르 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다시마의 감칠맛의 주성분이 글루탐산이라 는 것을 처음 발견한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약산성인 글루탐산을 중화하기  위해 나트륨을 첨가한 글루탐산나트륨을 스즈키 사부로스케 2세가 ‘아지노모토’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발매하면서 어떤 음식에 넣어도 맛있어지는 과학적  방법으로 만든 ‘마법의 가루’라고 광고했다. 그리고 MSG의 맛을 맛있다는 의미 의 일본어 우마이(うまい)에서 우마미(umami, うま味, 旨味)라고 명명하였다.  이케다의 MSG발명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식육’ (食育, Food education), 즉, 음식을 먹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에 이루어졌다. 메이지초기, 문명개화 의 바람을 타고 문명의 상징으로까지 인식된 육식은 국민국가형성을 반영하는  정치적 상징을 나타내는 기호이기도 하였다. 그 배경에는 사회, 경제, 정치체제 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식생활 개선을 통해 일본인의 체격을 서구인의 체구로  양성하려는 메이지정부의 서구화정책과 관련하고 있다.  


식문화개선문제가 사회적인 과제로 부상하는 가운데, 1907년, 동경제국대학  이학부화학과(현, 동경대학이학부화학과)교수,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 1864-  1936)는 인간의 미각을 자극하는 다섯 번째 맛, 우마미를 발견한다. 그는 제국대 학(현, 교토대학)부교수 신분으로 1899년부터 국비유학생이 되어 라이프치히대 학에서 노벨화학상(1909)을 수상한 오스발트(Wilhelm Oswald, 1853–1932)에게  2년간 물리, 화학을 사사받은 후 1901년에 동경제국대에 취임하였다.26) 그리고  1907년, 그는 실험을 통해 일본인이 오랫동안 음식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사용해 온 다시마의 핵심성분이 글루탐산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음식 의 맛은 다랑어나 다시마에서 추출한 다시를 바탕으로 한 맛으로 된장, 간장,  어장(魚醬) 등 발효조미료의 기본 맛은 발효과정에서 생산된 글루탐산이나 이노 신산(inosinic acid)이 만들어내는 아미노산의 맛이 우마미이다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 1864-  1936)


이케다의 MSG, 즉 우마미의 발견은 1907년 봄 아내가 도쿄 히비야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구입한 국물용 다시마의 다시를 먹어보고 일본전통음 식의 맛을 좌우하는 다시마의 감칠맛을 인공적으로 추출해낼 수 없을까라는  관심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전부터 이케다는 색소로 후각을  자극하는 향료는 많지만 화학공업으로 미각을 자극하는 제품이 사카린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어 조미료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케다가 다 시를 주로 사용하는 일본전통요리의 본고장인 교토출신이라는 것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이케다의 MSG라는 조미료의 발명은 사회시스템은 물론 생활전반에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을 통한 구습타파를 지향한 메이지정부의 정책방향에 따라 식 생활에 실용과학을 접목시킨 것으로 MSG발명 이외에도 해수의 가열 증발에  의한 제염법의 연구, 아황산가스를 유황으로 되돌리는 공해 방지법 등 국내외적 으로 50건에 달하는 특허등록을 하였다.  


조미료를 발명한 계기에 대하여 이케다는 미야케 히이즈(三宅秀)의 박사논문 에 가미(佳味)가 식물의 소화를 촉진하나는 글을 읽고 “원래 우리 국민의 영양불 량을 우려하던 한 사람으로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를 오랫동안  고민하면서도 좋은 안을 얻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름 괜찮고  저렴한 조미료를 만들어 자양이 풍부한 검소한 음식을 맛있게 하는 것으로  이 목적을 달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난해 중지하던 연구를  다시 개시하기로 결의하였다”며 조미료연구는 영양은 좋지만 맛이 없는 식사를  맛있게 먹게하기위해 시작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맛을 우마미로 정한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육류나 생선 등에서 우리가 ‘맛있다(우마이)’고 느끼는 일종의 맛이 있는데 다랑어,  다시마 등의 다시물에서 그 맛이 가장 명료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주관적인 사항이  이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즉시 혹시 잠시 후 항상 동감이라고 답을  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4미(四味)이외에 일종의 다른 미각이 있다는 것을 부정 하기 어려다고 느껴 지금은 어떤 사람의 발의를 받아들여 설명의 편리함을 위해 이 맛을 우마미(うま味)라고 명명하였다.


 이케다는 다시마에서 추출한 글루탐산이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이라는 기본  4가지 맛과 다르고 그 맛을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 맛을 맛있는 맛, 즉 우마미(うま味, 旨味)로 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케다가 식문화에 관심을 직접 갖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이지정 부의 일본인체력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데, 독일유학 당시 독일 인의 골격에 비해 왜소한 일본인의 체력보강을 위한 영양부족개선 방안 책을  연구하게 된다. 하다케야마 히시시게(畠山久重)는 이케다의 아지노모토 연구의  동기를 3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국민의 영양을 증진할 목적이었 다고 설명한다. 그는 조미료와 음식과의 관계를 염색과 직물의 관계로 비유하며  아무리 형편없는 소재라도 조미료가 더해져 맛있어지면 소화도 잘되고 건강해 지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염색에는 합성화학으로 제조되는 것이 많고 향기로운  후각을 만들기 위한 향료연구는 많지만 미각을 증진시키기 위한 연구는 사카린 을 제외하고는 매우 부족한 상태여서 화학자로서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화학은 응용이 어렵다는 편견을 타파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이다. 즉, 서민들의 일본의 맛없는 식사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MSG, 즉 화학조미료연구에 돌입한 결과,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탐산이 우마미 의 원천이며 여기에 나트륨을 더한 글루타민산 나트륨은 맛이 한층 좋아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1907년, 일본인이 오랫동안 음식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사용해온 다시마의  핵심성분이 글루탐산임이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추축에 하는데 성공한 이케다 는 이케다는 이 발명품을 상품화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 스즈키제약소를 운영하 던 2세 스즈키 사부로스케(鈴木三郎助, 1868-1931)와 만남으로 아지노모토라는  신개념의 조미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케다가 발견한 우마미의 상품화는 스즈키제약사를 운영하던 스즈키사부로스케에 의한 것이었다. 원래 곡류와 주류의 도매상하던 하던 스즈키집안이 요오드 사업을 시작한 것은 피서를 위해 요코스카에 놀러왔던 대일본제약합자회사(현,  대일본스미토모제약)에 다니던 1888년 무라타 슌레이(村田春齢)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부친, 사부로스케 1세가 사망한 후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요코스카에서  민박집도 겹하고 있었던 스즈키집에 머무르게 된 무라타가 해안에 떠다니는 해조 에 요오드성분이 다량 함유되어있으니 이를 사업화하라는 말에 1888년부터 요오 드사업을 뛰어들었는데, 1880년경 일본각지에서 요오드제조가 서민의 부업으로  행해지게 되었고 스즈키집안도 도쿄제국대학의 나가이나가요시(長井長義)교수 의 지도하에 요오드관련제품을 생산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면서 스즈키 는 1893년 「스즈키제약소(鈴木製薬所)」를 설립하며 사업을 본격화한다.


그 다음 해인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하고 요오드가 부상자 치료재로 사용되 면서 스즈키집안에서 제조한 요오드를 수출하게 되고 이어진 러일전쟁에서는  요오드를 육해군에 군납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척하게 된다. 33) 이처럼 스즈키제 약소의 요오드 및 질소사업은 러일전쟁으로 붐을 맞으며 2대 사부로스케는 관동 지구 화약품업계의 일인자로 발돋음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후 요오드판매의  급감으로 사업적으로 엄청난 위기에 처하게 된 사부로스케가 새로운 판로와  신상품개발을 모색하던 중 동경대이학부 교수인 이케다가 요오드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연구소로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아지노모토가  탄생한 것이다. 




味の素本舗事務所


사실 연구내용은 요오드사업과는 관계없는 우마미 추출을 위한  것을 알게 되었다. 생활개선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케다는 이대  사부로스케(二代三郎助)의 요청으로 다시마에서 나오는 감칠맛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실험을 위해 다시마를 재로로 감칠맛추출실험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다시마의 맛은 글루탐산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1908년 4월24일 ‘글루탐 산을 주요성분으로 하는 조미료제조법’에 관한 허가를 출원하여 그 해 7월25일  허가등록을 받아 인공적으로 조미료로 만들 방법을 모색하였다.  1908년, 사부로스케는 이케다와 특허권을 공유한다는 계약을 체결한 후 상품 화를 위해 카나가와현에 제조공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생산 개시부터 3개월이지난 1909년 3월, 글루탐산 나트륨 (MSG) 순도 85 % 정도에서 조해성이 강한  갈색을 띠는 분말 형태로 출시되었다. 34) 처음에 MSG를 생산하는 과정은 단순했 다. 다시마와 같은 해조류에서 뜨거운 물로 추출했다. 물론 지극히 비효율적이었 다. 40kg의 해조류에서 겨우 30g을 생산할 수 있었다. 가격이 비싸고 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케다의 MSG의 발명으로 다시를 내지 않고 소금 간을 하듯, 음식에 뿌려만  주면 맛있는 음식으로 탈바꿈시켜 주게 되자 아지노모토는 ‘마법의 가루’로도  불리게 된다. 사실 다시마와 다랑어, 멸치 등으로 내는 다시가 베이스가 되는  일본요리에서 다시국물을 내는 것은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MSG의 발명은 「다시」가 맛있다고 느끼는 일본인의 입맛이  서구의 과학을 습득한 일본인에 의해 과학적으로 해명된 것이다.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간단히 맛을 내는 MSG의 발명은 그야말로 메이지정부가  추구하는 서구의 과학적 방법에 의한 생활개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4. 아지노모토는 과학의 산물  이케다는 글루탐산을 발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성분을 공업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케다는 이 새로운 화학조미료의 이름을 미정(味精)으로 정했데,  너무 약품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의견에 「다시노모토(だしの元)」, 「아지노오우 (味の王)」 등이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일본어로 발음이 동일한 「元」대신,  「素」으로 바꿔, 「이지노모토(味の素)」로 정해졌다.35) 스즈키는 아지노모토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이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아지노 모토가 동경제국대학의 화학자가 서구의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품홍보에 대대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1909년 4월에 도쿄 우에노에서  개최된 제1회 발명품박람회에 참가하였고, 여기서 동상을 수상하여 세간의 관심 을 받은 후 다음달, 5월 2일에 일반인 판매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적자를 면하지못하였는데, 판매망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미료라는 신개념의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웠다. 이에 스즈키는 아지노모토를 홍보하 기 위해 전국의 유명 요리점 시식회를 개최하여, 요리사들의 입소문으로 상품을  홍보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오사카의 요리사들에게는 평판이 좋았다. 


아지노모토 허가증

이는  관동지방 요리는 주로 가다랑어를 다시로 사용하지만 관서지방은 다시마 맛을  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문광고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  자주 이용하기 어려웠던 스즈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아지노모토를 선전하였 는데, 승합마차, 거리의 악사, 현수막에 최근에야 익숙해진 자동차에 전광판을  붙여 시내를 도는 방식 등이 동원되었다.  아지노모토가 신문지면에 처음 등장한 것은  판매 6일째 되던 1909년 5월 26일 �도쿄아사히 신문(東京朝日新聞)�이었다. 아지노모토의 신 문광고에는 「이상적 조미료」,「식품계의 대변 혁」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더불어「이학박사  이케다선생의 발명(理学博士池田菊苗先生発 明)」라는 글을 아지노모토의 등록상표가 된 미 인상표(美人印) 위에 게재하였다.  그 뒤에도 아지노모토의 광고에는 감칠맛의  개발자가 다름 아닌 동경대 이학박사가 발명 했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광고전략을 세웠 다. 다시마라는 천연재료에서 추축된 아지노 모토는 일본의 식문화혁명을 위해 서구의 과 학적 방법으로 발명된 간편하고 합리적인 인 공조미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맛도 좋 고 다시비용에 대비 저렴한 가격, 거기에 내무성의 도쿄 위생시험소의 무해검사 를 통과해 안전하다는 점도 팜플렛, 신문광고의 PR문구로 사용되었다.

3. 아지노모토 발매 제1호광 고, 東京朝日新聞, 1909.5.26


  1909년, �도쿄화학회지(東京化学会誌)�에는 “최근 음식에 조리에 많이 사용 하는 것은 아지노모토이다. 아지노모토 안에는 많은 양분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양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맛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며 발매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아지노모토가 음식 에 많이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영양이  풍부하다고 설명하였다. 정토 종의 스님, 마츠미야 바쿠엔 (松宮麦園)도 “최근 음식의 조 리에 많이 사용하는 것이 아지 노모토이다. 아지노모토 속에 는 많은 양분이 포함되어 있 다.……많은 양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면 자유 롭게 맛있는 맛을 덧입힐 수  있다.”며 영양만이 아니라 음식을 맛있게 해준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한, 여학교의 화학 및 가사의 참고서로 출간된 �여성의 화학�에서는 첨단과 학을 사용한 조미료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아지노모토의 성분과 글루탐산의  추출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아지노모토를 사용한 요리법도 소개하였다.


이처럼 아지노모토는 첨단과학을 사용한 조미료로 맛과 영양이 풍부하다는 점 을 최대의 장점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아지노모토의 광고전략은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서구의 기술로 서구 열강을 물리친 러일전쟁(1904-05) 승리직후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즉, 단순 한 서구문명수용이나 흉내 내기가 아닌 서구의 기술로 자국문화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식이 일본의 지식인 사이에서 팽배해진 시기였기에 이케다의 발명품 인 아지노모토는 국가위상을 드높이는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5년에 출간 된 �삼식식단 및 요리법(三食献立及料理法)�에서도 아지노모토를 이학적으로  발명된 만능조미료로 누가 어떤 요리에 사용해도 간단하게 맛을 내는 순백의가루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아지노모토를 비경제적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용법이 부적합하기 때문으로 잘 사용하면 시간 과 수고를 절약해 ‘문명의 여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도록 손쉽게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조미료라고 칭송하였다. 


아지노모토를 만능의 조미료라고 하면서도  비경제성을 논하는 것은 높은 평가에 비해 여전히 서민들이 사용하기에는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6%라는 엄청난 물가상승이 일어났다가 1907년과  8년에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4.1%로 도리어 물가하락이 일어나는 등, 일반  서민들의 삶은 너무 팍팍했다. 1910년경부터 물가상승이 약간 진정세를 보이 기는 하였지만 각지의 은행이 지급정지가 발상할 정도로 불황이 심각하던  상황에서 1909년, 14g:40전, 30g:1엔, 60g:2엔 40전이라는 발매당시 가격은 당 시 대학 초임이 35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고가였다.


아지노모토가 간장처럼 일본음식에 빠질 수 없는 만능조미료로  서민들의 식탁을 책임지는 조미료가 되기까지는 1920년대 중반까지 기다려야 만 했다. 선진국들의 찬사가 이어졌다는 홍보와 전국의 진귀한 상품만 진상한다는  일본왕실 담당의 궁내성에서의 사용은 아지노모토의 안정성과 영양보증은 물 론, 모더니티와의 연결된 생활양식으로 연결되었다.오사카에서의 매출에  자신감을 얻은 사부로 스케는 아지노모토판매망을 도쿄에서 나고야, 오사카로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오사카출장소는 조선, 대만등의 판매를 관할하게  된다.  아지노모토는 서구의 선진문물로서의 박래품과 일본인들의 성과물을 전시하 는 각종 박람회에 출품되었는데, 1914년에 개최된 동경대정박람회(東京大正博 覧会)에서는 금상을 수상하고 이를 신문광고에 게재하였다.


1918년경 아지노모토광고

 1922년에 개최된  평화기념동경박람회(平和記念東京博覧会)에서는 아지노모토식당(味の素食堂)이 운영되었는데, 1원50전 정도의 가격을 받던  정식을 80전으로 책정하여 손님들이 문전성시 를 이루기도 하였다. 저가로 박리다매의 상술을  펼친 아지노모토 식당은 손님을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것, 가격이 저렴하고, 맛이 있는 3가지 요인 에 주안점을 두고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와  손님이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 여 손님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손님회전 을 빠르게 하여, 저렴한 식사가격에도 많은 이윤 을 창출시키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그야말로  패스트 푸드의 개념의 시초라 할 수 있는데 이러 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조미료 의 사용으로 조리시간의 단축과 저비용으로 음 식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지노모토식당광고,  平和記念東京博覧会, 1922


1930년대 한국신문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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