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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un 27. 2022

규동과 스키야기--소고기를 먹기 시작하다

맛은 문명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제도, 산업, 문화의 서양화를 통해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이룩하고자 한 메이지정부의 변혁은 사회, 경제제도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문명개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메이지정부의 정책으로 서양문물의 다량 유입과 생활양식의 양풍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식문화에도 영향을 주면서 식문화는 생리학,  영양학 등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 배경에는 개국 후  한눈에도 차이나는 군사력의 과 일본인과 서구인의 체격에 대한 차이를 극복하 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메이지정부가 일본인의 체격향상에 주력한 것은 서구열강에 뒤지지  않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함으로, 명치정부는 1874년에 구미식군사교육 을 실시하는 육군토야마학교(陸軍戸山学校)를 설립하는 한편, 일반국민들에게 는 보병조련, 군대교련의 일환으로 서구식체조, 즉 국민체육(the national athletic) 정책을 전개하였다. 


한편, 1872년 학제(学制)제정으로 학교에서 체육교육이 실 시되자 1878년, 우수체육교사양성을 목적으로 문부성학무과에 체조취조과(体 操取調掛)가 설치되고 1886년에는 학교체육에서 보통체조와 병무체조(兵式体 操)가 병행되어 시행되었다.  서구인과 대등한 일본군인양성문제는 청일, 러일전쟁을 거친 후 그 필요성이  더욱 절박하게 대두되었지만 이 문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일본인들의 식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메이지정부는  체육교육과 더불어 서구식으로 식문화를 개선하는 식문화개량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일본은 에도시대의 나가사키외국상관에서나 외국사신접대 등 특 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675년 텐무천황(天武天皇)에 의한 일본최초의 육식금 지령 이후 약 1200년에 걸쳐서 육식금지, 기피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1868년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공포 이후 1871년12월17일에 육식해금조치로 일본에  육식문화를 도입하면서메이지신정부는 식문화에 있어서도 서구화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즉, 육식해금으로 체력을 향상하여 일본인의 체력적인 열등감을  불식하고, 서양요리를 보급하는 것으로 서구의 뛰어난 식문화, 나아가 문명을  섭취, 흡수, 동화하려 하였다. 

 에도 말에서 메이지초기의 육식문화는 규나베(牛鍋, 소고기전골)붐에서 야기 되었다. 일본 최초의 규나베집은 메이지유신이 발발하기 전인 1862년 외국인  거류지가 있던 요코하마의 이세쿠마(伊勢熊)라는 음식점에서 시작되었다. 가게  주인은 고베에서 소고기를 가져다 먹는 외국인들이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고기 를 입수하여 에도시대부터 약으로 먹었던 보탄나베(牡丹鍋,멧돼지전골)와 모미 지나베(紅葉鍋, 사슴고기전골) 등에 힌트를 얻어 된장맛국물에 고기토막을 넣어 규나베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安愚楽鍋(1871‐72)〈仮名垣魯文〉중에서

고기만 첨부되었을 뿐 일본의 전통적인  나베요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규나베는 육식에 거부감을 갖은 일본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1867년에는 도쿄에도 규나베 분점 이 오픈되면서 규나베 열풍이 불었다. 


소고기집을 방문한 고객 사진, 牛店雑談 一名・奴論建. 2編

메이지기의 육식해금을 계기로 도쿄와  요코하마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본의 전통조리법과의 절충된 규나베, 스키야 키, 고롯케, 돈카츠 등이 개발되면서 대중화되었다.  도쿄에서의 규나베 인기로 규동집을 소재로 한 서적 등이 다수 출간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871년, 소설가 가나가키 로분(仮名垣 魯文, 1829-1894)이  발행한 �우점잡담 아구라나베(牛店雑談 安愚楽鍋:一名・奴論建)이다. 이 책은  규나베집(牛鍋屋) 고객들과의 대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재미있는 20개의 에피 소드와 그에 따른 삽화가 삽입된 초편, 2편 상하, 3편 상하로 이루어진 대중소설 이다. ‘사농공상 남녀노소, 현자, 우자(愚者), 빈자, 부자 할 것 없이 규나베를  먹지 않으면 개화한 자라 할 수 없다고 까지 언급한 로분은 이 책 3권 하에서  규나베를 먹는 서생에 대한 삽화에서 ‘소고기를 먹지 않지 않으면 개화라 할  수 없다(牛鍋喰はねば開化ぬやつ)’라며 규나베가 문명개화의 상징임 을 천명하였다. 이 책의 유행으로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남아있던 도쿄에 규나베 가게가 70점포이상 등장하는 등 하이칼라음식으로 자리메김하게 되었 다. 하지만 여성들이 규나베를 먹는 것이 금기시되는 행동으로 인식되었는지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고객은 20화 중 단 2화만 등장하다. 그나마도 일반여성이  아닌 기생이나 찻집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暗愚楽鍋』 삽화, 소고기 먹는 서생
安愚楽鍋 중에서

�도쿄개화번창지(東京開化繁昌誌)�에는  메이지초기 일본인들이 소고기를 스키야키,  규나베(소고기전골), 찜 등으로 해먹고 있다 는 기록과 각 지방 소고기의 질과 값에 대한  자세히 설명, 그리고 도쿄에서 소고기집이  번창하고 있다는 기술이 들어 있다. 메이지초기, 육식이 얼마나 특별하게 인식되었 는가 하는 것은 소고기를 섭취하는 모습을  그린 쇼사이 인케이(昇斎一景)의 니시키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메이지정부의 육식 장려정책에 결정적  힘을 실어준 것은 단발, 양장 등 개화의 상징을 솔선하여 선보였던 메이지천황이 었다. 1872년 �메이지잡지�제26호는 1200년에 걸친 육식 금지를 깨고 ‘천황이  육식을 장려하고자 아침부터 육식을 즐겼다’는 기사를 내보내는 동시에 일본왕 실은 육식해금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기류를 타고 그해 승려들에게도  육식과 결혼이 허락되었다.

도쿄개화번창지(東京開化繁昌誌)


 서양문명은 우수하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메이지천황이 육식섭취는 일반대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문명개화와 서양숭배가 시대의 기풍이 되었던 메이지초기, 생활양식의 근대 화는 식사에까지 영양을 주었다. 메이지정부의 적극적인 서양문화수용정책은  일본의 식문화에도 영향을 주면서 소고기를 먹지 않는 자는 문명인(개화인)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육식은 문명의 상징처럼 인식 되어갔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육식은 외국인이 먹는 야만적인 음식이라는 의식이 팽배했던 메이지시대,  육식반대론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을 타파하고 육식보급에 크게 공헌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나 핫토리 세이치(服部誠一) 등 지식인들에 의 한 육식의 계몽이다.  그 중 후쿠자와는 천지간에 동물은 육식과 초식동물로 나눠지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은 초목조어수육(草木鳥魚獸肉)가리지 않고 먹고 있는데, 고래로 부터 농업국이었던 일본은 고기를 먹는 일이 매우 드물어 영양이 한쪽으로 치우 쳐 병약한 자가 많으니 앞으로 육식도 하고 우유도 먹어야 한다고 언급한 후  육식의 이해손실을 따지지 않고 금육이 오랜 관행을 들어 반대하는 것은 한  나라의 손망(損亡)으로 이어진다고 반박하였다.핫토리 세이치도(服部誠一)도 �도쿄신번창기(東京新繁昌記)�초편 「소고기 집(牛肉店)」에서 후쿠자와의 의견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고기는 사람에게 개화의 약방 문명의 좋은 약이다. 이것은 정신을 좋게 하고  위장을 건강하게 하고 혈맥을 도와 피부, 살을 살찌게 한다.……고기집이 외곽도시에  즐비하게 들어선 것은 최근으로 그 수를 셀 수조차 없다.……소고기의 유행은 기차를  타고 뉴스를 전하는 것보다 빠르다.……너, 소야, 나는 너를 극락으로 인도하마. 너는  온화하고 느릿한 성격인데, 활달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을 양육하는구나. 네가 혹여  사람을 양육하지 않았다면 국가의 문명은 없다. 국가에 문명이 없으면 세상에 개화도  없다. 즉, 개화의 덕은 너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최근 들은 건데, 너는 가끔 미인의 입에도 들어가는데 그것은 극락정토 의 왕생이다. 


 오랫동안 육식이 금기시되어왔던 일본에서 육식은 병자들에게만 먹이 는 보약으로만 섭취되어왔기 때문이다. 1901년에 발간된 �동경풍속지(東京風俗志)�는 메이지정부의 육식장려 정책으로 인해  ‘소고기집(牛肉店)’유행을 삽화와 더불어 도쿄 의 신풍속으로 소개하였다.


東京風俗志  일본 최초 소고기집 



横浜市中区伊勢佐木町  최근 모습

  메이지초기의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서구적  식생활의 권장은 강력한 국민국가형성을 위해  일본인의 신체강화에 필수적인 요건으로 인식 한 메이지정부의 정책에 의거한 것이었다. 서구 인에 비해 열등한 일본인의 체력을 개선하는 일은 국민모병제(国民皆兵制)를 강요한 메이지정 부로서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급무였다. 이를 위 해 메이지정부는 군대의 배급식도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영양학에 근거한  식사섭취가 추진되었다.  


  서구인의 우월한 체격과 서구기술문화에 대한 동경은 서구의 진화론의 수용 과 이를 근거로 한 일본인종 개종론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1877 년에 동경제국대학 이학부생물학과에 부임한 S·모스(Edward Sylvester Morse)에  의해 �동물적 진화론(動物進化論)�(1883)이 번역되면서 유전인자와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등장은 다윈의 자연선택과 진화론을 근거로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 의 능력을 결정한다는 인종주의로 발전하는데,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인 다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의 �일본인개량론(日本 人種改良論)�(1884)에서 우수한 인종인 서구인과 일본인과의 결혼을 통해 일본 의 인종을 서구적으로 개종하자는 극단적 주장까지 대두하기 이른다. 물론 그  배경에는 백인이 지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우월하다는 백인 우월주의적 사상 에 근거한 것으로 메이지시대 철학자, 이노우에 테쓰지로는 ‘지적으로도 금력으로도 체격에서도 그 외의 백반의 일에서도 대부분의 서구인에 뒤떨어져 있으므 로 경쟁하면 항상 지는 것이 필연……구미인은 일본인보다 비대하고 건장’ 하다 며 서구인과 일본인의 체중을 연령별로 비교하면서 하물며 중국, 조선인보다도  왜소하여 마치 열등인종처럼 여성이나 소아의 골격과 유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메이지시대의 실업가, 마스다 다카시(益田孝)도 ‘이것(고기)은 맛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은 실로 위대하다. 그런 것을 먹으니까 대단해진 것이 다. 우리들도 서양인은 먹어서 대단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먹고 있다.’20)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인들의 육식문화가 서구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인식이 메이지시대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강건한 국민, 강력한  군인을 양성하고자 하는 메이지정부의 정책에 의거하여 식문화는 식육, 즉 음식 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관한 교육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메이지정부의 육식권장은 일부 부유층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로 대부 분의 서민들은 매우 곤궁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고 정부의 육식권장은 그야말로  극소수의 사람들이나 즐길 수 있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서민들의  식사는 밥, 된장국, 장아치에 약간의 나물이 추가되는 정도였다. 더군다나 메이 지시대부터 일반인들도 생활이 좀 나아져 보리나 잡곡 대신 흰쌀밥을 먹게 되면 서 단백질은 물론, 비타민까지 부족한 상태가 되자,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식육(食育, Food education)이라는 신개념이 등장할 정도였다. 서서히 사 회구조의 근대화에 따른 국민건강 관리의 실시, 실생활의 개선이 절실히 요구되 기 시작하였다. 식욕(食育)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일본육군의 약제감(軍隊薬劑監)이었 던 이시즈카 사겐(石塚左玄, 1851-1909)으로 1898년에 출간한 �식물양생법론(食 物養生法論)�과 이 책을 좀 더 알기 쉽게 저술한 증보판, �화학적 식양장수론(化学 的食養長寿論)�(通俗食物養生法)에서였다. 의사이며 약사이기도 하였던 이시즈 카는 사람들은 토지가 사람을 키운다고 하지만 잘 먹는 것이 사람을 크고 건강하 고 지혜롭고 용기있고 마음을 온화하고 고상하고 정숙하게 한다고 언급한다.21) 그러면서 인생식양의 영양성분 중 동물성단백질이 보건장생이 제일중요하다며2식육은 ‘체육, 지육, 재육은 곧 식육이다(体育智育才育は即ち食育なり)’라며  일정의 식양생법에 의한 어린이들의 심신을 키우는 일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시즈카의 이러한 주장은 영국의 사회학사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  1903)의 교육론, Intellectual Education, Moral Education, Physical Education에서  차용하여 1871년 문명론을 전개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학문의 권유 (学問のすゝめ_)�에서 교육의 기본을 「지육・덕육・체육」으로 정의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이시즈카는 서구의 과학을 근거하면서도 일본 의 전통사상과 식문화를 근간으로 한 식양(食養)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서구 근대과학을 분석한 것을 근거로 인간의 장수와 건강을 위해 곡물과 야채를  주식으로 하는 전통적인 일식이 좀 더 몸에 좋다는 ‘의식동원(医食同源)’, 즉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토지에서 채취한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신토불이  식문화운동이었다. 이시즈카의 식양론의 특징은 방법론적으로 근대과학을 채 용하면서 세계관이나 생활양식이라는 점에서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것 이다. 이시즈카가 만든 식육이라는 조어가 보통명사로 사용되게 된 것은 1903년,  �호우치신문(報知新聞)�과 �부인세계�등을 편집장을 역임한 무라이(村井弦斎) 의 인기 연재소설, �식도락(食道楽)�(1913)의 「식육론(食育論)」을 통해서였다.  소설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후쿠자와의 문명개화사상을 알기 쉽게 전달한 무 라이는 요즘 세상은 체육론과 지육론이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이건 정도와 적절 함을 요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후 “체격이 좋아지고 뛰어나게 하려면 근육을  만드는 음식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뇌를 발달시켜 뛰어나게 하려면 뇌의 자양분 을 주는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 체육의 근원도 음식에 있으니 지육의 근원도  음식에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체육보다도 지육(智育)보다도 식육이 제일 중요 하지 않은가 하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라며 건장한 체력육성에도 두뇌발달 에도 적절한 음식섭취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오늘날에도 사용 되고 있는 식육이란 용어는 먹거리에 관한 지식과 음식을 선택하는 능력을 습득 하여 건강한 식생활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넓게 국민의 계몽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사쿠라자와 유키가즈(桜沢如一, 1893-1966)은 서구의  의학과 영양학에 근거한 이시즈카의 식양론을 계승하면서도 식양론을 일반화 하기 위해 서구근대과학만을 사용하지 않고 동양의 음양사상에 의거하여 인체 나 생명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정식론(正食論)을 전개하였다. 그는 생 명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동양의 의학, 영양학의 우수성을 강조하 였다. 하지만 그의 식양론은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비판받았는데 메이지시 대의 식문화를 둘러싼 논쟁은 시대적 배경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이케다 키쿠나에의 우마미의 발견은 서구식 식문화의 과학을 근거로 하면서 도 일본의 전통을 반영한 합리적 식문화개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루 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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