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를 관람했습니다. 미야자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로, 실사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서 ‘집중하며 봐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아무런 홍보도 없이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종래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변주되는 소년(소녀)의 이계 체험, 삶과 죽음, 자연과 문명(프로메테우스의 불) 등의 클리셰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빠르게 스토리가 전개되던 기존 영화와 달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극한으로 치닫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혼란과 불안, 갑작스러운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시작됩니다.
불꽃처럼 하늘을 가득 뒤덮은 공습에 의한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후 시간이 멈춰버린 주인공 마히토(眞人)의 마음은 느리고도 무거운 피아노 선율로 그려집니다. 공습을 피해 아버지와 외가로 온 마히토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작은 파장을 일으킨 건 ‘왜가리(アオサギ)’였습니다. 하지만 ‘왜가리’의 유혹의 몸짓에도 그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히토는 전학 간 중학교의 동급생들에게 맞은 부상을 숨기듯 스스로 머리를 돌(石)로 쳐서 상처를 내고 앓아눕습니다. 마사토는 “이 흉터는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나의 악의의 표시입니다(この傷は自分でつけました。僕の悪意の印です)”라고 고백합니다.
새엄마가 된 나츠코(夏子) 이모에게 사랑을 빼앗긴 마히토가 아버지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수업은 안 하고 전쟁 준비만 시키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미히토의 마음을 왜가리가 파고들며 “엄마는 죽지 않았어, 엄마에게 데려다줄게”라고 속삭입니다. 이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마히토는 마음이 흔들려 이계로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된 말로 현혹하는 왜가리는 ‘진실한 사람’이라는 주인공의 이름, 마히토(眞人)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인 데미안이었을 겁니다.
마히토가 사는 별관 옆에는 메이지 시대 하늘에서 떨어진 탑이 있는데 이 탑에 가까이 가는 걸 집안사람들은 말립니다. 이 탑으로 들어간 종조부(大叔父)가 종적을 감췄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탑은 ‘이웃집 토토로’의 상수리나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터널처럼 죽은 자들이 사는 이계(異界), 혹은 명계(冥界)로 통하는 길이었던 겁니다.
탑에서 사라진 종조부를 마히토가 대면할 때 그는 불안 불안한 듯 흔들리는 돌 블록(石積み)을 쌓고 있었습니다. 후에 종조부는 미히토에게 ‘악의적으로 물들지 않은 13개의 블록’을 건네주며 불의로 가득한 네 세상이 아닌 이곳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마히토는 단호히 거절하고 새엄마를 데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계에서 어린 시절의 죽은 엄마를 만나고 탐욕으로 일그러진 앵무새로 부터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새엄마를 구하는 등 극복 온갖 경험을 하고 돌아온 마히토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그리움 가득 가슴에 담아둘만큼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모,나츠코를 어머니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음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악의로 접근한 왜가리를 더없이 다정한 친구로 받아들입니다.
마사토가 살아야 할 세상은 종조부가 말한 것처럼 탐욕과 오욕으로 가득한 세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계의 세상역시 ”풍요롭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는 아니었습니다. 몸집이 작아 억눌려있던 앵무새들은 자신 보다 약한 생명체를 무참히 죽이고 잡아먹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 어디에도 온전한 평화만 존재하는 세상은 없는 겁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 ‘모노노케 공주(もののけ姫),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등의 마지막 대사인 ‘살아가야 한다(生きねば)’ ‘살아라(生きろ)’라는 대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마히토는 혼란의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겁니다.
이 영화는 마히토의 머리에 상처를 낸 돌(石)로 시작해 돌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영화에서 돌은 중요한 메타파로 묘사됩니다. 영화에서는 돌과 나무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처럼 이항대립으로 묘사됩니다. 돌은 무생물이면서 인공적인 기술, 나무는 생물이며 자연입니다.
일본어로 돌은 ‘이시(いし)’라 부르지만, 의지도 ‘이시(いし)’라고 합니다. 그러니 영화에서 말하는 돌(石)은 의지(意志)를 표상하는 중의적 의미일 겁니다. 이전의 미야자키 영화에서는 자신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면 이계에서의 경험을 잊어버리는데 이번의 마히토는 이계에서의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건 굳건히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갖기 위해 저세상의 물건 ‘돌(이시)’을 가져왔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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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부의 블록쌓기는 미야자키의 영화 만들기입니다. 영화에서 종조부가 13개의 돌을 쌓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미야자키의 13번째 영화입니다.그래서 아마 종조부는 미야자키 자신을 표상하는 거라고들 보고 있습니다.
미야자키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돌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쌓아 올리며 커다란 세상 쌓기를 한 겁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내며 거장 미야자키 감독은 ‘당신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이기심과 증오로 물든 세상을 살 것인지, 거짓된 말로 우리를 선동하고 현혹하는 왜가리를 화해와 관용으로 품고 친구로 만들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