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은 아직 유효한가?
한일관계가 강제징용피해자 배상문제로 해법을 찾지 못하고 갈등으로 치닫던 2019년. 일본 문화를 분석한 고전 ‘국화와 칼(菊と刀,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번역본 2종이 새로이 출간됐습니다. 이 책은 미국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미국 전쟁정보국(OWI)으로부터 일본인의 국민성에 관한 연구를 의뢰받아 작성한 책입니다.
전쟁 중이라 일본에 갈 수 없었던 그녀는 미국에 거주하거나 미국 수용소에 수감 중인 일본인 인터뷰,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 신문, 영화, 군사자료 등에 의존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2년의 연구 끝에 작성된 베네딕트의 보고서는 일본 문화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정신적 사고방식을 파헤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 ‘국화’와 무사도를 의미하는 ‘칼’이라는 상반된 상징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의 근대 문명을 수용했지만, 일본의 문화는 과거 일본식 윤리 체계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고, 일본인들은 여전히 각기 알맞은 위치에서 직분을 다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자신이 속한 영주에 대한 충(忠)은 천황에 대한 충으로 바뀌었습니다.
서구의 물질문명을 찬양하며 부국강병을 외치면서도 ‘일본의 전통과 정신을 소중히 여기며(和魂), 서양에서 배운 학문·지식·기술과 조화롭게 발전시키자(洋才)’라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정신. ‘화혼’과 ‘양재’의 분리를 전제로 한 일본의 근대화였지만, 서구의 기술보다는 일본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정신문명을 강조하는 문화, 계층질서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집니다.
이로써 국가는 충을 다해야 하는 어버이의 모습으로 재무장하고 국민은 그런 어버이를 정성껏 섬겨야 하는 관계로 설정됩니다. 그러니 국가 위기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부모를 버린 패륜 행위가 돼버리는 겁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다룬 일본 드라마 ‘더 데이스’(2023)를 시청했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현장을 진두지휘한 요시다 소장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원전 폭발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무능한 관료주의와 도쿄전력 수뇌부의 눈치 보기는 조그마하 막을 수 있었던 참사의 크기를 가속화합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본질적 문제에는 눈을 감으면서 원전직원과 파견직원들의 목숨을 건 희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 가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는 그들의 희생이 아름답기보다는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책임을 묻고 분노했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은 정말 그런 희생을 원했던 걸까요.
요시다 소장은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하며 누군가는 남아야 하는데 누가 남겠냐고 합니다. 그런 무언의 압력 속에서 원전 직원 90명은 죽기를 각오하고 가족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남아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가 아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장면에서 일본인들은 이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동하겠지만, 이런 논리는 태평양전쟁에서 죽음을 강요하는 군국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일본군대는 절대로 항복하지도 투항하지도 말라고 교육했습니다. 부끄러운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게 만드는 건 그들의 선택이 아닌 보이지 않은 집단주의입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유행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술회전(呪術廻戦)’ 2기(期)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시부야에서 저주사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주술사 후시구로(伏黒)를 구하기 위해 나나미(七海)를 비롯한 다수의 주술사가 기꺼이 목숨을 잃습니다. 주인공 이타도리 유지(板取悠仁) 또한 죽음을 결심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죽음이 이렇게 미화돼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리기 위한 싸움을 위해 죽음을 먼저 결심하는 모습을 이처럼 처연하고 웅장하게 묘사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멋있게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멋있게 살기 위해 오늘을 견뎌내는 사람이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