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식(食)자에 입구(口) 자의 ‘식구(食口)’는 가족을 의미하는 참 독특한 우리나라만의 표현입니다. 가족은 결혼이나 혈연관계로 맺어진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식구’라는 표현은 한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족이라고 너무나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에 상당한 의미부여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식사하셨어요?’라고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언제 식사라도 하시죠’라는 말을 건넵니다.
다른 사람과 밥을 먹는다는 건 타인을 가족의 범위로 끌어들일 만큼 친밀한 관계라는 의미일 겁니다. 가족과 식구는 거의 같은 의미인 것 같아도 이 두 표현은 서로 대체해서 쓸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식구 같은 분위기’라고는 하지는 않죠. 직장이나 동아리 등에 새로운 팀원이 들어오면 ‘새 식구가 들어왔다’ ‘○○○이 새 식구가 되었다’라고 하지 ‘새 가족이 들어왔다’라고는 하는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식구는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한다는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12월 가족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 ‘3일의 휴가’와 일본영화 ‘괴물’ ‘교토에서 온 편지’ 이렇게 3편의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겨울에는 유독 가족영화가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아이들과 바깥 활동이 어려워진 부모들이 자연스레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관을 찾기 때문이라네요. 그런데 이 세 영화 중 우리나라에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의 ‘괴물’은 가슴 훈훈해지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가족이 삶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는 단단한 믿음이 있다면 젊은이들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 낳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줄곧 가족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 일본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온 고레에다는 16번째 장편영화 ‘괴물’에서 가족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가족은 행복의 조건인가? 정말 가족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도로 위의 하얀 선인가? 등의 문제를 던져줍니다. 어쩌면 이게 가족이야, 이게 정상이야, 이렇게 하는 게 가족의 도리야 라며 내 가족을 옭죄인다면 그건 나를 지키는 안전선이 아닐겁니다.
일본영화에서 가족은 가장 많이 변주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일본에서 가족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신정부는 에도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가족제도를 법으로 제도화하는데 이것이 가부장(호주)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이에(家)’ 제도입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여성은 가부장이 될 수도 집안을 물려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에(家)’ 틀에 갇힌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낸 것이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와 나루세 미끼도(成瀬巳喜男) 입니다. 패전 이후 가족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영화에서 TV 드라마로 옮아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가족의 사랑을 소재로 한 야마다 요지의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등과 같은 영화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호주제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의 근대 가족은 피를 나누지 않은 혈연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며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거품이 붕괴한 1990년대 일본에서 가족의 형태는 달라집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녀나 부모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전통적 가족 형태가 무너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2004)’ ‘걸어도 걸어도(歩いても 歩いても,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奇跡, 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2013)’ ‘바다마을 다이어리(海街diary, 2015)’ ‘태풍이 지나가고(海よりもまだ深く)’ 등에서 병원에서 바뀐 아들, 양자 등 과거의 혈연 중심의 가족관에서 탈피해 다양하고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던져줍니다.
2018년에 개봉한 ‘어느 가족(万引き家族:원제목은 소매치기 가족)’은 혈연이 가족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가족의 전제조건임을 보여줍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그의 아픔도 기쁨을 나누면 그게 반려견이든 반려묘이든 가족입니다.
2013년 영화 ‘고령화 가족’의 엄마는 가족에게 이런 말을 하죠. “가족이 뭔 대수냐. 같은 집에 살고 같이 밥 먹고 또 슬플 땐 같이 울고 기쁠 땐 같이 웃는 거. 그게 가족인 거지.”
한해가 끝나가는 요즘 영하의 날씨로 온몸이 추워들어오지만 좀 따뜻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본다면 당신의 가족은 무한히 늘어가는 기분을 느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