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짧은 여행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취업하거나 한 달, 혹은 일년 살기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일본 한 달 살이? 취업? 저도 아직은 여행이 좋아 일년에 한두 번은 일본여행을 갑니다. 그곳에는 나를 끌어당기는 편안함, 익숙함, 그 너머에 있는 정갈함과 엔틱함,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은 그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겁니다.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각역마다 서는 완행(보통)열차를 타고 아무 데나 내려도 이미 우리에겐 사라져버린 풍경들을 그대로 간직한 곳들이 많습니다. 이런 느낌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 도시나 시골에서 더욱 많이 느낄 수 있는데, 절대 흔들어놓을 수 없다는 듯 철길 옆 네모반듯한 모양의 논밭에 반듯하게 나 있는 길들, 정갈하게 정돈된 집들은 질서정연하고 평온합니다.
일본의 도시들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나가사키의 짬뽕, 카스텔라, 후쿠오카의 돈코츠라멘처럼 거의 모든 도시가 특별한 볼거리가 있고 즐길거리도 있고 먹거리도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온 식자재로 만든 지역 술도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한 기념품에 결국 그 도시의 먹거리나 사 들고 들어왔던 기억이 있는 나에게 도시의 특성을 반영한 기념품들은 여행 이후의 추억을 선물해줍니다.
왜 그런 걸까요? 관광사업이 우리보다 잘 되어 있어서? 지방자치제의 역사가 우리보다 길어서? 물론 그런 것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이 일어나기 전까지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지역의 영주들이 지배하는 그야말로 도시국가들이었다는 것이 다른 점일 겁니다.
일본의 정치체제는 유럽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좀 다르고 우리나 중국과도 다릅니다. 1400년경부터 정치제도는 장원제도에서 그 지역을 지배하는 다이묘(大名) 등으로 불리는 지방 영주가 지배하게 됩니다. 지방의 어느 지역을 통치하는 영주가 사치 때문이든 기근 때문이든 돈이 없으면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러니 광활한 토지로 비옥한 쌀을 수확했던 이시카와현이나 도야마현은 ‘가가 100만석(加賀百万石)’으로 불릴 정도로 부자나라였지만, 쌀농사를 할 수 없던 큐슈의 나라들은 우리나라 등으로 노략질을 하든지, 중국 등과 무역으로 돈을 벌든지 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돈벌이가 되는 건 뭐든 해야 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리타도자기(有田焼)가 큐슈 사가현(佐賀県)에서 탄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했지만, 도자기 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던 일본은 다도에 사용되는 고가의 다기를 전량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어 일본의 은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탄식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무조건 조선에서 도공을 잡아간 거죠.
도자기를 만들어내라는 일본 영주의 요청으로 조선의 도공들은 도자기를 만드는 흙(고령토)을 발견하여 기술을 발전시켜 그의 이름으로 신사까지 지어졌으니 그 대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도공의 이름은 이삼평입니다. 이 귀한 도자기 기술을 행여나 다른 지역으로 유출될까 하여 이 지역의 항구 이마리에서만 이를 거래하게 하여 이 도자기는 이마리도자기(伊万里焼き)라고도 불립니다. 이건 모든 특산물이나 상권을 중앙에서 관리하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니 지역마다 매실이든 귤이든 뭐든 만들어 팔아야 했고 그런 문화가 기반이 되어, 에도시대에 비록 상인의 지위는 미천했지만 각 지역의 특산물을 거래하는 거상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에게도 삼국시대의 문화적 특성이 지역에 남아 있지만, 수십 개의 나라가 있었던 일본만큼 다양한 색깔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지방 도시에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지역문화가 아니라 몇백 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진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지역들이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건 알겠는데, 그러면 왜 일본의 거리나 동네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걸까요? 도쿄나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 대도시들의 번화가도 길을 걷다가 길모퉁이를 돌아가면 조금 전 시끌벅적한 도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지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의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식당이 있기도 하고, 때론 여긴 신사라는 걸 표시하는 도리이와 빨간 턱받이를 하는 오지죠상(お地蔵さん)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곳은 이미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고양이의 보은’ 속 고양이 마을이 되기도 하고, 좀 낡고 허름한 식당에서 마츠시게 유타카(松重豊)가 군침 돌게 혼밥을 먹고 있는 ‘고독한 미식가’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 맛이 이미 예견되는 체인점 식당들입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식당들은 대형 체인점보다는 작고 소박한 식당들이 많지요. 물론 그래서 그 문을 밀치고 들어가기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노곤한 오후 허기를 달래기 위해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레집이든, 우동집이든, 고깃집이든 달큼한 간장 냄새가 가장 먼저 코를 자극합니다. 그런데 그런 집 중에는 꽤 연차가 된 가게 들이 많습니다.
도쿄나 교토나 오사카, 코치 등 오래된 도시들에서는 300년 된 우동집, 초밥집, 150년 된 빵집 등 가볍게 백년을 넘긴 노포들이 즐비합니다.
그건 ‘’을 찾는 손님처럼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믿음 속에 자녀들은 부모의 가게를 이어받을 수 있고, 그 자녀는 부모의 맛을 그리워하며 그 식당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유사한 맛을 선보이며 전통이라는 것이 쌓여나갔습니다.
하지만 셀 수 없는 많은 전란에 식민지지배, 한국전쟁 등으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던 우리는 한 곳에서 안정적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재개발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순식간에 들어서면서 구도심지는 힘을 잃고 SNS로 알려진 깨끗한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노포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움은 우리에게 힘입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도전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일본은 미 연합군에 의한 공습을 제외하고 단 한 차례도 자기 땅에서 전쟁을 치른 적이 없습니다. 패전 이후 더군다나 연합군의 공습조차 없었던 지방의 도시는 식량부족이나 징집을 제외하면 이들에게 전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그건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삶의 공간이 변화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나에게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일으키고 일본의 도시들이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