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와 이재명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에서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며 '당신들 일본인은 미국으로부터 이런 잔학한 일을 당해도 화나지 않는가'라는 체 게바라의 발언에 전혀 꿀리지 않고 격노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1918-1993). 총리 재임 기간은 2년 5개월여에 그쳤지만, 16선의 중의원 의원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는 서민 이미지가 강한 총리로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속에 그는 특별하다.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임에도 선거 때마다 '가쿠에이 대망론(角栄待望論)'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록히드 사건'으로 일본의 금권정치(金權政治)와 정경유착(政經癒着)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다나카이지만 2020년경부터 대형 서점에는 그를 기리는 책들로 가득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아베노믹스'를 추진해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 속에 일본인은 '일본열도개조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이끈 다나카를 소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온다.
그가 이 정도로 일본인의 뇌리에 박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분명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총리였다. 일본인이 기억하는 다나카 가쿠에이는 호탕하고 과감하고 거리낌 없는 스케일이 큰 정치인이었다. 숫자나 실무에 밝았고, 사물을 돈으로 환산해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인물로 정적(政敵)들로부터 품위 없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그런데도 그는 빠른 ‘결단과 실행’으로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이지만 그는 금도(襟度)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꾸짖을 때는 아무도 없을 때 해야 하고, 칭찬할 때는 많은 사람 앞에서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다나카는 측근이 아니더라도 인재를 등용하는 등 파벌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나카는 총리 재임 중에도 천황에 대해 신하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고 그의 측근들은 전한다. 일왕은 정치에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일왕의 질문에 다른 총리들은 예의 바르게 짧게 두세 마디로 답을 하지만, 가쿠에이는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관철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왕을 반대하는 사회당과는 전혀 다르다. 일왕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거침없었다. 이런 총리의 행동에 쇼와 천황도 상당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중일 국교 정상화(1972년), 도시에 집중된 예산을 지방으로 분산하여 국토를 균형발전 시키겠다는 일본열도개조론이다.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동북지역에 고속철도(신칸센)를 놓았다. 사회복지에도 관심이 많았던 다나카는 총리 2년 차였던 1973년, '70세 이상 의료비 무료' 정책을 도입하여 일본은 복지국가로서의 발돋움하게 된다. 일본인에게 다나카의 매력은 일본 열도의 균형발전보다는 그의 성품과 그의 성공담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다나카는 흙수저 중에서도 찐 흙수저 출신이다. 동북지방 니가타(新潟)의 가난한 시골 마을의 거간꾼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5살에 도쿄에 상경한 다나카는 토건 회사 사환, 무역회사 직원, 잡화상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중앙공학교 토목과에 들어가 건축일을 배워 25살이 되던 1943년, 다나카 토건공업을 설립한다. 다나카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29살로, 국토의 균형발전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그의 외침은 설득력 있게 일본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있다.
다나카의 기적의 출세담은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베스트셀러 '일본 열도 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의 엄청난 스케일과 맞물려 다나카 가쿠에이의 인기는 그야말로 거의 신드롬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20세기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비쳤다.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다나카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내각 때인 1957년 우정 대신이 되고, 1972년, 52세의 나이에 총리가 됐다. 하지만 '일본 열도 개조론(日本列島改造論)'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국토가 신칸센과 고속도로의 망으로 묶이면서 부동산투기의 바람이 불었고 토지는 급등했다.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무너졌다.
이와는 반대로 신축, 신도시 건설, 교통망 확충되면서 토건 업체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거기에 다나카의 유연한 정치 스타일로 여겨지던 호탕함은 도덕과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벌어들인 돈으로 동료들을 모으고 관료들은 손에 넣은 것이었다. 결국, 미국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사가 다나카 등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항공기 판매의 편의를 얻으려 한 '록히드 사건(ロッキード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총리직에서 쫓겨나고야 만다. 다나카는 더러운 돈을 먹은 정치가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인들은 다나카를 흠모하고 추앙한다. 이는 다나카가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룩한 버블의 상징으로 공과가 있었지만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쉽사리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마나 그의 리더쉽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요미우리신문은 이재명대통령의 일본방문시, 다나카 전총리 보좌관을 지낸 이시바시전수상과의 만남전에 이재명대통령과 다나카의 삶을 비교하여 보도한 건 이 두 사람의 삶의 행적이 어느 면에서는 비숫하다는 판단에서 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