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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un 22. 2022

노조키

남의 삶이 궁금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SNS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아빠들의 육아를 들여다본다는 자못 신선한 소재의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에서 시작된 관찰 예능은 「슈퍼맨이 돌아왔다」로 이어졌습니다. 촬영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온 나라 사람들은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귀여운 아이들의 엉뚱한 행동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관찰 예능은 아이들을 키워보았던 사람에게는 추억을,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와서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竹原春朝斎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일 겁니다. 그것도 대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훔쳐보듯 화면이라는 작은 구명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더욱 짜릿합니다. 일본에서는 노조키(覗き, 覘き, のぞき)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내에서 어떤 가면 쓴 사람이 무슨 푯말을 들고 서 있는 걸 봤습니다. 저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노조키베야(のぞき部屋)라는 거였습니다. 과하게 노출된 옷을 입거나 다양한 복장으로 코스프레를 한 여성을 구멍으로 훔쳐보는 거죠.


에도시대의 노조키방


17세기 말, 일본

노조키

에서는 네덜란드(オランダ)에서 유입된 작은 렌즈(レンズ)로 구멍 속을 들여다보는 ‘노조키 카메라(のぞきメガネ)’가 유행하였습니다. 평면적인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 기구를 ‘노조키 가라쿠리(のぞきからくり)’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라쿠리(カラクリ)는 기계장치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1910년대에는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의 그림을 겹쳐서 마치 동영상처럼 보이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나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 ‘노조키 가라쿠리’는 사라졌지만, 작은 구멍으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는 거죠.



근대 이후 도시가 형성되면서 누군가의 삶을 함께 구경하는 대중문화가 탄생했습니다. 내 이웃들의 이야기를 신문, TV 등을 통해 매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1998년에 개봉한 ‘트루먼 쇼(The Truman Show)’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실처럼 꾸며진 스튜디오 안에 살지만,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삶을 텔레비전 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중계한다는 설정이 다소 허무맹랑하면서도 너무나 섬뜩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영화와는 결이 다르지만, 넷플릭스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나의 첫 심부름 (はじめてのおつかい)’도 일본판 관찰 예능입니다. 아이가 안전하게 심부름을 할 수 있도록 ‘트루먼 쇼’처럼 방송카메라맨들이 주민처럼 분장하여 거리 곳곳에 포진하죠.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만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무사하게 잘 성장하려면 어른들의 관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촬영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들여다본다는 점에서는 노조키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락거리들이 점점 더 상업화되면서 관찰 예능은 점점 진화하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일상은 왠지 우리와 다를 것 같다는 대중의 호기심은 연애인 관찰 예능으로 이어지고, 일반인의 연애, 가족 간의 갈등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대중 소비를 위한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제는 실시간 스트리밍, SNS를 통해 거의 모든 순간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동질화’되고 ‘획일화’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된 자신의 삶이 권태로워 또다시 누군가를 찾아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우리를 찍어대는 CCTV가 불편하면서도 다른 사람도 통제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합니다.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노조키의 행위는 그 사람의 삶에 흥미를 갖지만,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관여는 노조키가 아니니까요. 관여하는 순간 책임과 의무도 함께 져야 하니까 한 발 떨어진 곳에서 훔쳐보기만 합니다. 하지만 내가 훔쳐보는 누군가를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듯 나를 훔쳐보는 사람들은 나를 위해 섣불리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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