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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an 11. 2023

우리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위로가 필요하다

해가 바뀌고 0TT에서 지난 드라마한편을 다시 보면서 지난 해 젊은이들의 무고한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이 사회에는 아이들을 지켜줄 시스템도 어른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뎌진 시스템, 무뎌진 사람들의 마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세상. 그저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사회에 과연 세금이란 걸 낼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가라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을 향해 구조가 아닌 휴대폰을 들이대며 찍어대고 그것을 보란 듯 유튜브에, SNS에 올려 ‘좋아요’를 벌어들이는 사람들을 보며 더욱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그 참혹한 현장을 자신이 보던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듯 마구잡이로 찍어낸 영상물은 여과 없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이런 참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 타인의 불행에 무감각해진 우리의 마음을 더욱 믿기 싫었습니다.


 2018년 한 tv 방송에서 방영한 ‘나의 아저씨’를 보며 잔혹한 비극을 떠올리며 '어른'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를 일본에서 방영한다면 「와타시노노 오지상(私のおじさん)」이라고 번역이 될 겁니다. 일본어로 「오지상(おじさん)」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아저씨’의 의미이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이름을 부르는 일본에서 실제로 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대신 “아! 그 아저씨(あのおじさん)”, “너 아저씨답다(お前、おっさんだな)”처럼 ‘아저씨’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남성들이 아저씨를 좀 더 친근하게 혹은 좀 경시하는 느낌으로 「오지상(おじさん)」이 아닌 「옷상(おっさん)」으로 부르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로는 오지상의 한자, 백부(伯父), 숙부(叔父)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삼촌’ 등 남성 친인척을 일본에서는 「오지상(おじさん)」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럼 드라마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주인공 ‘지안’은 그 이름과 달리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채 변제를 독촉하며 청각장애를 가진 할머니를 구타하는 사채업자를 말리다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살인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짊어지고 부모의 사채와 할머니의 부양책임을 다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 곳을 돌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지안의 삶은 처절하게 혼자입니다.



그녀가 파견직으로 있는 회사의 부장, 박동훈은 그런 ‘지안’을 편견 없이 바라봐주는 어른입니다. 동훈은 지안에게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건축구조기술사로 건물의 안전진단을 담당하는 박동훈은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력이 세면 견딜 수 있겠지만 그렇게 내력으로 외력을 버텨내는 삶은 고단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든 회사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던 동훈도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버텨내는 걸 포기함으로써 편안함에 이르는 길도 있다는 걸 상처받은 지안을 보듬어 안은 ‘어른’ 아저씨를 통해 보여줍니다.


일본어로 어른은 ‘오토나(おとな)’로 한자로는 대인(大人)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 나이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몸도 큰 진정한 ‘오토나(おとな)’로 사는 걸까. 자신의 잣대로 비난하고 편견 어린 눈으로 멋대로 판단하며 정작 ‘지안’의 상처에 눈을 감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동욱은 지안을 위해 할머니가 입원할 무료요양병원도 알아봐 주는 것밖에는 크게 한 것이 없습니다. 축 처진 어깨와 지친 발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동욱을 지켜보고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준 것은 거꾸로 ‘지안’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청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있다고 생각할지 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편견 없이 청춘들을 바라봐주고 혼자 있게 하지 않고, 구해달라고 하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손이라도 잡아주는 것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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