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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an 14. 2023

나는 주인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얼마 전 2011년에 만들어진, 일본영화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ツレがうつになりまして)'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 만화 일부


주인공은 특별히 뭘 하고 싶어 하는 의욕이 없는 낙천적인 여성으로 결혼 전 남편이 그녀가 그리는 만화가 재밌다는 반응에 만화를 그리지만, 출판사에서 재미없다고 만화연재를 거부당합니다. 이에 비해 소프트웨어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남편은 요일마다 정해진 색의 넥타이에, 정해진 색의 치즈로 도시락을 싸는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남편은 결국 업무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걸리고, 이 병을 아내와 함께 극복해가는 성장 휴먼영화입니다.



그런데 제목에 등장하는 남편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쯔레(つれ, 連れ)입니다. 이 말은 連이라는 한 자에서 알 수 있듯이 동반자라는 의미입니다. 간혹 집사람을 지칭하는 카나이(かない, 家内)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남자들이, 아내가 동반자임을 나타내고자 자기 아내를 타인에게 소개할 때 '제 쯔레(わたしのつれ, 私の連れ)'라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아내가 남편을 지칭할 때는 남편을 '쯔레'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에 가타카나로 쯔레(ツレ)라고 표기한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지아비 부(夫)자를 써서 옷토(夫, おっと)라고 하기도 하고, 남편의 이름에 상(さん) 혹은 짱(ちゃん)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기도 하지만, 남편을 단나(旦那, だんな), 테이슈(亭主, てしゅ)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단나는 하인들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남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고, 테이슈(亭主, てしゅ)는 가게 종업원이 가게 남성주임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데, 이 말들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상당히 가부장적이며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된 느낌을 주는 표현들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슈진(主人)이라는 표현으로 얼마 전까지, 아니 지금도 꽤 많은 사람이 남편은 주인이라는 한자를 써서 슈진(主人)이라고 합니다. 아마 일본드라마를 보시면 "이쪽은 제 슈진입니다"(こちらは私の主人です) 등과 같은 대사를 접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주인이라뇨.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러면 이 표현은 언제부터 일본에서 사용된 걸까요. 1917년, 『부부지우(主婦之友,しゅふのとも)』라는 잡지에서 결혼한 여성이 남편을 부르는 호칭에 대한 앙케이트를 실시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남편은 '당신, 즉, 아나타(アナタ)'로, 남의 남편은 '슈진(主人)'이라고 부른다는 답변이 많았습니다. 당시, 일부 상류층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일본에 전업주부라는 개념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중산층 여성들은 남편은 주인이고 자신은 주부라는 생각이 퍼진 겁니다. 다른 집 남편에게는 존경의 고(ご)와 님(さま)까지 붙여가며 고슈진(ご主人), 혹은 고슈진사마(ご主人さま)라고 부릅니다. 슈진이라는 표현은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가 없는 주종관계에 놓은 관계성을 드러내는 어휘로, 1990년대부터 맞벌이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여성들의 수는 줄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슈진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7년 앙케이트 결과에 의하면 여전히 23.4%의 여성은 남편을 슈진(主人)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22.9%가 남편을 단나(旦那)라고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슈진이라는 호칭은 50대 이상 여성, 단나는 20대에서 40대의 여성이 주로 남편을 부를 때 사용한다고 하네요. 언어는 우리의 의식을 구체화한 형태로, 하나의 형태를 띤 언어는 다시 우리의 의식을 규정합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남녀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거죠.



다시 처음 소개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영화에서 남편은 일찍 일어나 스소로 도시락을 만들어 싸고, 출근하기 직전에 일어난 아내가 건네주는 분리수거물을 들고 집을 나섭니다. 아내는 당당히 남편을 "쯔레(つれ)"라고 부릅니다. 아내가 '좀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너무 아무 것도 안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존중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남편을 향해 아내는 오랫동안 깨지지 않아서 가치를 인정받는 작은 유리 화병을 생각하며 "안 깨진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거야. 깨지지 마. 츠레"라고 남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낮잠을 자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있어도 되고, 남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구아나나, 자라를 키우는데 돈과 시간을 써도 상관없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뭔가를 꼭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그가 남편을 쯔레(つれ)라고 하듯, 그녀도 남편의 쯔레(つれ)입니다. 그녀가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아서 그녀는 멋진 남편의 쯔레(つれ)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서로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는 삶이라면 어떤 형태의 부부라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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