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막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입학문제로 선생님을 학교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이 늦게 끝나 15분 정도 늦자 선생님은 “나도 방금 왔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나중에야 대체로 일본사람들은 약속에 늦은 상대방에게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약속을 변경하자고 하면 “나도 마침 일이 생겼는데 잘 되었네요”라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대체로 “그렇군요”(소우데스네, そうですね)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줍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친절하다', '배려심이 많다.' 는 인상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기즈카이(気遣い,きづかい)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기즈카이(気遣い)는 ‘기운 기(気)’에 ‘파견하다, 감정을 풀다’ 등의 의미를 지닌 ‘보낼 견(遣)’의 동사형 츠카우(遣う,つかう)를 붙여 만든 말로 사전적 의미로는 2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여러 가지 것에 마음을 쓴다.’라는 의미로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오키즈카이 아리가토 고자이마스:お気遣い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라고 합니다. ‘츤테레’투로 배려하지 않은 듯 배려하는 것이 아닌 기즈카이는, 세련된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기즈카이와 비슷한 말로 기쿠바리(きぐばり,気配り)와 코코로 즈카이(こころづかい,心遣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기쿠바리(きぐばり,気配り)는 한자 ‘나눌 배(配)’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 사람이나 상황을 잘 살펴 실수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것으로 우리말로 ‘∼에 눈치가 있다.’, ‘∼에 센스가 있다’ 등과 유사합니다. 이에 비하여 기즈카이(気遣い)와 코코로 즈카이(こころづかい,心遣い)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혹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위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코코로즈카이(心遣い)는 기츠카이보다 훨씬 더 마음을 쓰는 행동으로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대방을 챙길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 넘어지지 않도록 매트를 깔아놓는다든지 쇼핑 가방이 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을 건네주는 것 정도라면 기즈카이지만, 우산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짐을 들고 있는 고객에게 짐을 차까지 들어다 주는 행동은 코코로 즈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타인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을 ‘기즈카이가 데키루 히토(気遣いがでる人)’라고 하는데, 이런 평가는 인간관계에서 엄청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반대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의미의 ‘시라나이(しらない)가 아니라, ‘가능하다(できる,出来る)’의 부정문(できない)를 써서 ‘기즈카이가 데키나이 히토(気遣いできない人)’라고 합니다. 표현 그대로 해석하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 가능하지 않은 사람인 거죠. 모르면 배우면 되지만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난 안되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아 좀 가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즈카이(気遣い)의 또 다른 의미는 불안하거나 걱정스러운 마음을 나타낼 때 사용하며, ‘정보가 새나갈 걱정은 없다.(情報が漏れる気遣いはない)’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상대방이 알지 않았으면 하는 정보를 혹시 알아챌까 봐 걱정하는 마음을 표하는 말로 앞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불현듯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 마음을 쓰는 것이 내가 알기 원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걸까요? 대체로 기즈카이를 잘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잘 관찰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 여유가 있고, 타인을 위한 배려를 귀찮아하지 않고, 쿠션 언어를 잘 사용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늘 타인의 시선 혹은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거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지 몰두한 나머지 심지어 나 자신을 위축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왜 지나치리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려는 걸까요? 일본 중산층 집 현관에는 일본인이 사랑하는 소설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의 ‘나카요키고토 우츠쿠시키카나(仲良きことは美しき哉),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문구를 걸어놓은 집이 많습니다. 패전 이후 일본의 학교는 ‘갈등, 경쟁은 나쁜 것이고 두드러지지 않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좋은 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타인과 다른 의견을 내서 갈등을 일으키거나, 두드러지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고 알아서 조심하는 문화를 양산한 것이 아닐까요? 타인과 다른 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안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나 이지메(いじめ) 등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는 이런 문제를 한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로 치부하거나 가정교육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또한 일본 사회는 타인 혹은 한 개인이 속한 사회에 대한 지나친 배려(기즈카이,気遣い)를 강요하고, 가즈카이를 하지 못하거나, 나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억누르고 배척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는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너답게 나답게 살아도 되는 사회, 네 마음만큼, 내 마음도 소중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내가 나에게 기즈카이(気遣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코로나로 우리 삶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 시간들을 견뎌왔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결국 쉼표는 되지 못하고 불안감만 커져버린 시간들 이었습니다.구차하지만 나는 나에게 한없이 순하고 따뜻한 사람이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