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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un 17. 2023

비는 아와레의 정서를 만드는가?

아직 장마도 아닌데 제법 비가 내렸습니다. 봄은 북쪽의 찬 공기와 남쪽의 따뜻한 공기가 교체하는 시기라서 비가 많이 오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봄비를 소재로 한 노래가 많은가 봅니다. 그런데 이번 비는 태풍과 캐나다 산불의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비 오는 날 우울감이 드는 것은 일조량 부족으로 인한 호르몬 결핍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바깥 활동에 지장을 받는 것도 아마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쌀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지역에서 비는 소중하고 두려운 존재였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에도 비는 내리는 계절과 내리는 모습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안개비,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 싸리비, 소나기를 비롯해 달구비, 자드락비, 무더기비, 채찍비, 작달비, 바람비, 도둑비, 해 비, 먼지잼 등 엄청나게 많은 비의 명칭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비의 명칭은 주로 비가 내리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장마를 제외하고는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등 계절에 비를 붙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섬나라인 일본은 겨울을 제외하고는 정말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립니다. 그래서 일본인은 항시 가방에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죠. 비는 일본어로 아메(雨,あめ)라고 하는데 사탕도 한자는 다르지만 아메(飴,あめ)라고 합니다. 일본의 문학이나 영화의 기조가 차분하면서도 우미적 정취(優美的情趣)를 띠는 것도 비가 많은 일본의 기후의 영향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청량감보다는 아무래도 마음이 처지고 특정한 정서가 증폭되는 경향이 있는데 서글프고 애틋한 감성을 일본말로는 아와레(哀れ,あわれ)라고 합니다. 한자로 슬플 애(哀)를 사용하는 아와레는 우리말로는 비애, 애상함, 무상함 등으로 번역됩니다. 간혹 불쌍히 여길 련(憐)를 사용하여 아와레(憐れ)라고도 하는데 이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측은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을 나타낼 때입니다. 이 말은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物の哀れ)’라는 말에서 기인한 표현입니다.



모노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히메(もののけ姫, 원령공주)의 모노(物,もの)와 동일한 말입니다. 한자로 사물 물(物)자를 쓰지만, 사물만이 아니라 생물, 무생물, 추상적인 개념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모노입니다. 그러니 모모노아와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니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서글픔이라 할 수 있죠. 그렇게 본다면 일본 미학을 대변한다는 아와레(あわれ)의 감정은 일 년 내내 내리는 비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일본도 비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봄에 내리는 비를 봄 춘(春) 자를 써서 하시구레(春時雨, はるしぐれ)라고 합니다. 하시구레는 봄의 따뜻함,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말로 일본의 전통 시문학인 하이쿠(俳句)에 자주 등장합니다. 여기서 시구레(時雨,しぐれ)는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나타내는 말로 겨울로 막 들어설 때 후드득 하고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겨울비와 구별하기 위해 봄 춘(春) 자를 넣어 하시구레라고 하는 거지요. 봄비 중에서도 입춘에서 입하경에 벼락 치며 내리는 봄비를 슌라이(春雷, しゅんらい)라고, 벚꽃이 피는 무렵에 내리는 비는 사쿠라 아메(桜雨,さくらあめ) 또는 꽃 화(花)를 써서 하나시구레(花時雨. はなしぐれ)라고 합니다.




그리고, 5월에 내리는 비는 사미다레(五月雨, さみだれ)라고 합니다. 근대 이전에는 음력을 사용했으니까 실제로는 5월 말쯤에 내리는 장마를 말하는 거겠죠. 지금은 6월에 내리는 장마는 별도로 매화의 매(梅)를 써서 쯔유(梅雨)라고 하지만, 음력을 사용하던 근대 이전에는 사미다레(五月雨)와 장마의 쯔유와 거의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굳이 일본 고대의 문헌으로 구별하자면 사미다레는 무서울 정도로 엄청나게 내리는 비를 말하고, 쯔유는 그냥 장마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금은 장마 대신 쯔유라고 하지만 한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나라 시대에는 일본에서도 장마(長雨)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름날 저녁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비는 저녁 유를 써서 유다치(夕立ち), 초가을에서 늦가을에 오는 차가운 비는 얼음 빙(氷)자를 써서 히사메(氷雨, ひさめ), 가을장마는 가을 추와 장마 림을 써서 슈우린(秋霖, しゅうりん),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내리는 비는 시구레(時雨, しぐれ)라고 합니다.




또한, 일본도 비 내리는 모습에 따라 안개비는 기리아메(霧雨, きりさめ), 가랑비는 고사메(小雨, こさめ), 지나가는 비는 토오리아메(通り雨), 소리 없이 내리는 비는 쌀겨를 의미하는 고누카(小糠, こぬか)를 써서 고누까아메(小糠雨, こぬかあめ)라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우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맑은 날에 잠깐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하죠? 여우를 사랑한 구름이 여우가 시집가자 너무 슬퍼 울어서 비가 내리는 거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도 이런 비를 여우, 즉 기츠네가 시집가는 비(기츠네노 요메이리 아메, 狐の嫁入り雨)라고 합니다. 아마도 여우비는 일본어의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울적해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빗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는 6월, 비가 내리면 후각도 발달하며 평소 그냥 지나치던 냄새들에 민감해집니다. 일상에서 무심히 흘려보냈던 시간이 소환되기도 하니, 모쪼록 향기 나는 추억으로 마음속 우울감을 벗어버리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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