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지난 학기에 한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
군대 얘기만 하는 선배가 있었다. 처음엔 멀쩡한 허우대에 마음이 동하여 옆에 앉아 있다가 이야기의 주제가 쉽사리 바뀌지 않을 걸 눈치 챈 나는 얼른 다른 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족구 얘기를 밤새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복학생도 있었다. 그중에 최악은 군대에서 족구 했던 얘기를 주야장천 해대는 복학생 형들이었다. 으... 사방이 지뢰밭이었다.
후니가 낼모레면 군대를 가게 되어 모인 자리였다. 코 찔찔 흘리던 때, 내가 코닦아주며 놀아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군대를 간다니 다 키웠구나 싶은 게 착잡한 마음에 자작을 해가며 막걸리를 마지던 중이었다.
입대 전날이면 의당 불러재껴야 마땅한 이민우의 ' 입영열차 안에서'를 울먹이며 부르던 녀석은 슬슬 시동을 걸더니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손 흔드는 사람들 속에 너를... 너...를..." 하더니 울면서 뛰쳐나가 버렸다.
지금까지 사내자식은 울면 안 된다는 누군가 정해놓은 룰 아래서 절대 울 줄 모르던 겁쟁이 몬스터들의 시대가 저물어 가며... 서서히 울 줄도 아는 남자애들이 가끔씩 출몰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뻔히 지들에게 달려 있는 그 무엇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00 친구라고 우기던 녀석 셋 중 하나였다. 후니는... 공대생들이던 이 세 아이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남고를 나와 대학교에 발을 딛으면서 것도, 공대에 들어오면서, 설마... 과에 여자애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야무진 꿈을 꾸며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그 꿈을 무참히 짓밟힌 불쌍한 중생들이었다. 그 로망을 동아리를 통해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이 하이에나들에게 서클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또 한 번의 무참함을 선사한 건 내 잘못이었기에... 그 미안함을... 여자가 못되 줄 바애는 엄마라도 되자 싶어서 코를 열심히 닦아 주며 이애들을 키우는 중이었다.
<물감, 냄새를 좋아하세요?>라고 흘려 쓴 찌라시 한 장에 쓰여진, 단지 그 한 문장 한줄에 홀려... 어두침침한 북악스카이웨이 같은 학생회관을 뚫고 맨 구석의 동아리실에 똑똑을 고하자 세명의 사내 녀석들이 쪼르르 앉아 있었다. 마침 선배들은 다 수업에 들어가고 이 셋이서 나를 맞아 주었다. 이렇게 나는 그 셋의 홍일점이 되어 이 동아리에 입당했다. 그들은 나를 홍일점이라 쓰고 청일점이라 읽는다.
누가 보면 여자 친군 줄... 이런 시선일랑은 상관없이, 지금의 후니의 심정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는 걔가 울며 뛰어나가자 나도 같이 그를 향해 튀어 나갔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선배를 <오빠>가 아닌 <형>으로 부르던 나 같은 애들만 보던 중, 새 학기를 맞으면서 새로 들어온 새내기 중에 여자여자하고 하늘하늘 한 <오빠> 를 <오빠>라고 부르던 홍해주가 끼어 있었다. 해주는 오빠들의 그동안 포기하고 살아야만 했던 오랜 로망을 단번에 채워줄 수 있는 만큼의 여자다움을 담뿍 담은,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환상적인 여자 후배였다.
그녀의 입당과 함께 그녀를 놓고 팽팽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정이가 먼저 찜을 하고 나섰다. ' 짜식... 거기 나는 왜 불러...&*%**' 어쨌든... 자기가 해주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금사빠인 이 녀석의 사랑고백은 우리들을 그리 긴장시키지는 못했다. 다만, 그동안 웬만해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던 진중한 후니 마저도 그녀를 위해 그린라이트를 켜고 달려가고 있다는 걸 촉이 좋은 나는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해주의 그린라이트는 상이를 향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내촉은 또 그것 마져 감지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상이가 해주 속을 타들어가게 하고 있던걸... 이 뽁짝 뽁짝한 상황들을 모조리 다 알고 있던 나는 그 누구의 편에도 설 수가 없었다.
정이-> 해주/ 후니-> 해주> 상이-> 상이 , 단 한 학기 만에 이 복잡한 먹이사슬이 그토록 빠르고 심각하게 전개될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은 어렸었다. 그중 가장 속앓이를 했던 건 후니였다. 해주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자기애가 강한 상이에게 행여나 해주가 상처 입을까 봐... 그걸 걱정하며... 내 어깨에 기대고 함잠을 울고 있었다. 입대 전에 고백이라도 한번 해보라고 달랬지만 울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또 한 번, 후니의 코를 닦아 주고 있었다.
" 자... 흥..."
"흥..."
후니의 입대를 시작으로 정이, 상이도 한 학기씩 사이를 두고 입대를 했다. 녀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만만한 내 사진을 군대 선임들에게 팔아먹어가며 슬기롭게(?) 군대생활을 해 나갔다. 나는 그것들의 군대 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됐다. 나는 팔자에도 없는 군인 아저씨들과의 펜팔과 폰팅과 1회성 만남으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우리들의 홍양>은 새로 사귄 ROTC 오빠와 온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그녀가 고무신을 꺾어 신었다가, 다시 신었다가, 갈아신었다가 하는 갖가지 묘기에 가까운 신공들을 빠짐없이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