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치열했던 순간순간들의 ‘구라’
천명관의 고래를 읽으며 마치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와 시대 상을 교묘히 잘 버무려낸 옛날이야기. 춘희라는 장애 여자의 일생을 시작으로 그 주변의 인물들 그리고 특히 그의 어머니 금복의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땔 수 없게 만드는 게 천명관 책의 특징이다. 고래, 나의 삼촌 부르스 리, 고령화 가족 등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낸 그지만 매우 존재감 있는 작가이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마치 무성영화를 해설해 주는 변사 같다고 느낀 건 비단 나만이 아녔으리라. 그의 말투는 어딘지 구슬펐으며 변사의 그것처럼 오버스럽기도 하지만 변사는 원래 그런 거다.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시대의 인물들이지만 하나 같이 범상치 않다. 그들이 지금을 산다고 해도 그들의 행태는 여전히 획기적일 것이다.
표지는 좀 구식의 요새 표지의 패턴과는 달리 조금 지루하고 촌스럽다(?) 고전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런 촌스러운 표지가 좋았다. 미끈하고 심플한 요즈음의 표지와는 차별된 것이 더욱 그랬다. 책 표지에서 이미 태맥산맥이나 토지를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장르는 판타지 같기도 하고 젠더 소설 같기도 하고 추리소설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신화? 설화 같기도 하다. 어떨 땐 무협지의 느낌도 난다. 여하튼 여러 종류의 장르를 섞어 놓아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전개는 전혀 조잡하지 않다.
고래를 처음 잡았을 때는 그냥 그런 시대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 책 표지와 책의 제목과는 달리 소설의 내용은 새롭고 지루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의아했던 부분은 어떻게 이렇게 방대하고 많은 이야기를 한 권으로 축약했을까였다. 만일 이 소재로 다른 작가가 썼다면 아마도 여러 권의 대하소설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깔끔하다. 이야기가 방대하고 구구절절하지만 절대 이것을 늘이기 위한 트릭을 쓰지 않고 글을 써내려 간다. 그래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책을 저녁에 집어 들어서 밤을 새우게 된 나는 오전에 책을 집을 걸 하며 후회했었다.
내게 생각하게 했던 이 소설의 키워드는 두 가지 여성성과 소통이었다.
고래에서 표현되는 여성관은 매우 특이하다. 다른 남자 작가들도 여자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들이 많다. 그러나 천명관의 그것은 다른 작가들의 것과 조금 다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먼저, 박색 노파, 그녀는 불리는 이름 없이 박색 노파로 명명된다. 그녀를 수식하는 박색은 그녀의 인생이 그녀의 외모로 인해 얼마나 고단했었는지를 보여준다. 박색인 얼굴로 인해 결혼 한지 하루 만에 소박을 맞고 이후로 남의 집 부엌데기로 전전하다가 반편이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아 딸을 애꾸로 만드는 과정까지... 우리나라의 외모지상주의를 살짝 꼬집는 대목이다.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외모만큼이나 박복했는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그것으로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그로테스크 해졌는지를 묘사한다. 그녀는 하나뿐인 딸과의 관계도 그녀의 돈에 대한 집착과 외모로 인한 피폐로 어그러져 버린다.
시골처녀 금복의 성장소설처럼 펼쳐지는 금복의 사랑과 야망은 노파와는 또 다른 여성상을 보여준다. 금복은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여인이다. 작가가 ‘금복은 역시 무언가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피어나는 여자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녀는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생선장수를 따라 평대에 오는 순진한 여성으로 표현되지만 생선장수의 변변치 못한 사업을 일으켜 극장을 세우고 벽돌공장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은 여장부로 묘사되며 중간에는 호르몬 주사로 인해 점점 남성화되어 급기야 여자와 함께 살게 되는 운명으로 까지 변화한다. 그 시대에는 적잖이 파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소설 속의 우연과 운명은 실타래처럼 꼬이고 꼬이며 매우 극단적으로 전개되지만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천명관의 탁월한 구성력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이야기 꾼이라는 증거가 이것이다. 금복의 딸 춘희의 삶은 마치 예전 TV 문학관에서 보는 백치 아다다의 삶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금복의 이야기는 어느 성공한 여성 CEO의 삶을 제구성 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그의 이야기는 고전과 현대물을 넘나 든다.
마지막으로 벽돌공장에 홀로 남은 춘희, 180센티미터의 키, 120킬로그램의 거구이며 말을 못 하며 동물들과 소통이 가능했던 그녀는 장애를 가졌으나 여자이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박색 노파나 금복과 마찬가지로 남자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며 꿋꿋이 인생을 살아낸다. 그녀와 금복의 모녀 관계는 보통의 모녀관계와는 다른 모습이다. 금복은 춘희를 거의 돌보지 않고 그녀와 소통도 하지 않는다. 춘희가 세상과 소통을 닫은 이유가 여기서 출발한다. 소설에서는 세명의 어머니가 나오는데 하나는 애꾸눈 딸을 낳은 박색 노파, 하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없는 춘희의 엄마인 금복 그리고 낳자마자 죽는 아기의 엄마 춘희다. 이 관계 중 우리가 익숙한 모녀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소설을 읽으며 이 세 모녀의 관계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여성, 여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모성, 여성성 이런 것들은 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적으로 엮였으나 자신의 욕망이나 야망 혹은 운명으로 인해 포기되는 비뚤어진 모성은 때로는 굉장히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순정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의 여성성 대신 진취적이고 때로는 남성성을 뛰어넘는 에너지를 가진 여성을 보여 줌으로써 여성의 모습을 모호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모호함의 메타포로 쌍둥이 자매가 나오는데 완전히 똑같이 생긴 운명공동체인 쌍둥이는 쌍둥이 중 하나가 먼저 결혼을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살며 나중에는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호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모호함은 금복의 삶에서도 반복되어 보이는데 뜨내기 생선장수에게 처녀성을 잃고 걱정-남자의 이름-, 칼잡이를 거쳐 사업가로 성장하면서 점점 남성화되어 나중에는 창녀 수련과 함께 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모호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춘자가 코끼리와 소통하는 장면, 금복이 고래를 보는 장면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고래는 매우 선정적이며 노골적인 묘사들이 많다. 남녀의 치정 장면을 미화하지도 꾸미지도 않듯 인간의 욕망도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의 삶은 그래서 더 노골적이며 선정적이고 날것의 생생함을 갖는다. 펄떡이는 고래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센 팔자의 굴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다. 요사이 페미니즘이네 뭐네 여성들의 지위에 관해 많은 설전들이 오가지만 그 설전에는 의미도 힘도 없었음을 느낀다. 오히려 작가의 이런 색다른 시선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똑같은 명제를 가지고 부성 애니 모성 애니 따져 가며 짐짓 모성애를 우위로 치던 선입견에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갖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소설 속에서 박색 노파와 애꾸눈 딸 그리고 금복과 춘희의 관계에서 모성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리를 증오와 무관심이 대신한다. 그와 대비되어 표현된 금복과 아버지의 관계, 애꾸눈 딸과 꿀벌 장사, 춘희와 의붓아버지의 관계가 오히려 더 끈끈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설은 1부 부두, 2부 평대, 3부 공장의 목차로 공간적 상징으로 분류된다. 1부는 박색 노파의 이야기와 그녀의 애꾸눈 딸 그리고 금복의 여자로서의 인생을 서술한다. 2부 평대는 금복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그녀가 남성으로 변화되는 과정 3부는 그녀의 죽음과 그녀의 딸 춘희의 이야기. 이렇게 공간인 듯 시간을 이야기하고 그 시간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마치 TV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죽음이 뜬금없지는 않다. 누군가는 증오로 누군가는 회한으로 누군가는 허무하게 각각의 죽음은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다. 삶의 다채로움 만큼이나 죽음의 모습은 다양하다.
이 공간들 중 평대는 금복의 등장과 함께 마을이 번창하고 금복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마치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처럼 상상 속의 마을 같다. 여기서 금복은 흥망성쇠를 겪으며 삶의 대부분을 살아간다.
무릇 소설이라 함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런 면에서 고래는 100점 만점에 200점이다. 소설의 장르를 넘나들며 범상치 않는 팔자를 살아내는 여인네들의 이야기는 지루한 틈을 주지 않는다. 천명관은 자신의 이야기를 ‘구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모름지기 구라는 현실적이면 안 된다. 뻥과 권모술수가 난무해야 한다. 사람들이 사기꾼의 구라에 넘어가 이유는 그것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구라는 좀 다른 맛이다. 씁쓸하다. 쌉쌀하다. 그래서 먹는 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중독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멈출 수가 없다. 그는 세 여인의 인생을 쉴 새 없이 풀어내며 도장깨기 하듯이 등장인물들을 죽여나간다. 독자는 그의 도장깨기 탬포만큼이나 숨 가쁘게 오락기 위의 재빠른 손놀림으로 책장을 넘겨 나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대한 궁금함의 갈증을 해소할 수가 있다. 정말 특이한 소설이다.
이쯤 해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천명관 그는 원래 영화 연출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변변한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릴 때 동생의 권유로 우연히 낸 소설이 성공하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영화 일을 하기 전까지는 골프장 점원 보험 영업 사원 등의 여러 직업들을 전전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이런 경험들이 소설에 오롯이 녹아져 다채롭게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우연히 그의 책 읽기에 관한 유튜브 채널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본인은 다독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대학도 다니지 못했지만 그는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고 책을 통해 “변화되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해준 이야기 중에 그가 군대 시절에 날씨 예측관을 했는데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3년을 구름을 보고 하늘을 보고 했다는 대목이 있다. 고래를 보면 풍경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의 그림을 보듯이 그가 보는 풍경을 독자도 같이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으로 이런 묘사가 가능했지 싶다.
‘그리고 바다를 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모두 끝나고 눈앞엔 아득한 고요가 펼쳐져 있었다. 곧 울음이 쏟아질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해의 섬들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멀리서 아른거렸고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엔 끊임없이 파도가 부딪쳐 포말이 일었다. 무심하게 고깃배 위를 오가며 끼룩대던 갈매기들이 어느샌가 쏜살같이 해수면으로 날아들어 물고기를 낚아 올리기도 했다. 콩닥거리던 가슴이 어느 정도 잦아들 무렵 그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 올렸다. 주변에 있던 어부들도 물고기를 보고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금복은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의 출현에 압도되어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물고기는 거대한 꼬리로 철썩 바닷물을 한 번 내리치고는 곧 물속으로 사라졌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고기가 사라진 뒤에도 금복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금복과 소설의 제목인 고래는 이렇게 조우한다.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의 찰나였으며 강렬했고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삶만큼이나... 그녀가 후에 극장의 이름을 고래라고 짓는 것도 이 찰나의 기억이 빌미가 된다.
고래를 읽은 독자들은 고래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고래를 우리 삶의 가장 강렬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쁨일 수도, 설렘일 수도, 슬픔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다. 누구나 가슴에 한 마리의 고래를 간직하고 산다. 우리 삶의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때때로 우리의 삶을 고래만큼이나 큰 몸짓으로 삼켜버리곤 한다. 격정적 순간은 운명이라고도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내 몸집의 몇 배만큼이나 큰 나를 삼키는 의도되지 않은 숙명인 것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의 이야기. 치열했던 순간순간들의 ‘구라’ 그것이 소설 ‘고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