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에서/김준한
끝내 너는 나와 다른 이름의 차표를 끊었다
소멸하지 않기 위해 허공을 깊이 파는 바람과
악취를 쌓지 않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물처럼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시절과 이별한 나는
비탈진 청춘의 노선 위에 몸을 실었을 뿐
처음부터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머무는 곳은 언제나 긴 노선 위의 버스가 잠시
정거하는 경유지에 불과했으므로,
그곳에서 늘 짧은 세월 내 가슴에 덜컹이며 들어앉았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또다시
낯선 오늘을 맞이하곤 했다
퍼질 것 같은 걸음의 버스가 들어서자,
관절에 굽은 어둠 일으키며 들어오는 달빛
오르고 내리는 건 제각각 무게 다른 봇짐들
한 번도 엔진 소리를 멈추지 않았던 청춘의 바퀴
그 닳고 닳은 하루가 나를 데리고 경유했던 수많은 정거장들이
시린 허공 속에 별빛처럼 번지는 밤,
막 버스에 오르는 저 느린 율동의 그림자들,
저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2003년 겨울 화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