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김준한
포석은 순조로웠어. 내가 그 직장에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같은 부서에 발령된 그녀는 눈부시도록 빛났으니까.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이 깊었기에 한쪽으로 쉽게 기울지 않는
대국이 될 거라 믿었어.
고리타분한 정수만 고집하며 살진 않았어. 이미 정해진 세상의
질서에 반감도 있었지만, 정수란 건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거잖아. 누군가 먼저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만큼
재미없는 삶이 어딨겠어. 창의적인 내 삶이 될 수 없었지.
발가벗고 외로움에 우는 내 모습보다 화려한 옷을 입은 채
고독을 모르는 껍데기들이 더 추해 보였어.
오빠 시 쓴다면서요? 저를 위해 한 편 써주세요.
어떻게 말을 걸까 가슴앓이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꺼낸 말은
기력 낮은 내가 감이 생각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수였지.
상대의 얕은 생각을 무시한 꼼수도 있었어. 부끄럽고 미안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로 마구 흔들었고 나는 분노한 수로 응징했어.
하지만 사석 통에 담기는 건 내 손을 떠난 돌뿐이었지.
내가 둔 수에 자화자찬하며 오만해지기도 했어. 아이러니하게 그런
수가 없었다면 진작 돌을 거두고, 내 인생 단명국이 되었을지도 몰라.
진실이 독이 되고 거짓이 약이 되는 수도 있잖아.
오빠 이번 주말에 맛난 거 사줘. 응 알았어.
깊은 수 읽기 하지 않고 그녀가 둔 수에 무심코 손 따라 둬 버렸지.
숙소에 도착해서 아차 싶었어. 그날 다른 약속이 있었거든.
생각할 시간은 한참 있었는데. 그녀에 대한 집착이 수를 제대로
못 보게 했던 거야. 그녀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
때문에 그녀가 단단히 오해를 했던 거야.
오빠 나 너무 힘들어서 더는 못 다니겠어. 이직할까 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어.
제대로 응수하지 못한 나는 초읽기 속에 초조해졌어.
결국 자충수를 두고 말았어. 다음을 이어가는 건 괴로운 일이었어.
술에 취해 울고불고 애원하며 한 수만 무르게 해달라고 절규해도
돼 돌일 수 없는 세월, 기울어진 승부를 역전할 방법은 없었어.
그녀를 잡지 못한 건 대 악수였지만, 세월이 흐른 후 아롱이다롱이를
만난 건 신의 한 수였어.
웃는 나를 보며 인상 찌푸리는 사람들이 고수라고 하는 바람에
슬픔을 너머 우주에 혼자 던져진 듯 고독해졌어.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아. 하수가 되지 않는 법을 알았거든.
그건 말이야. 욕심을 버리고 비우면 돼. 모든 것이 감사해지거든.
머리로는 누군들 모르겠니? 가슴이 실천하지 못하니 하수인 거야.
호적수를 만나고 싶어. 외롭지 않은 걸 보면 이미 만난 것도 같아.
이제부터는 승부수만 둘 거야. 청춘 다 써버리고 삼십 초 초읽기
한 번만 남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