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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혼멸

by 김준한

혼멸(프롤로그)


내 왼쪽 손목엔 다섯 번 칼로 그어 생긴 흉터가 있다. 그것은 20년 전쯤, 그러니까 내 20대 초반부터 긋기 시작한 삶의 강렬했던 흔적이었다. 살아 있음의 고통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서 그었던, 나는 그러니까 내 손목에서 솟구치던 피를 다섯 번이나 본 샘이다. 너무나 뜨거운 것이 내 안을 맴돌아 분출시키지 않으면 꽉 막혀 죽을 것 같아 나는 타 죽기 싫어서 내 손목을 그었다. 내 좁은 혈관을 돌고 돌던 그 뜨거운 피가 답답했던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허공 높이 솟구치던 그때 나는 희열을 맛보았다. 내 피는 마치 활화산, 지하 어둠 속에서 끓던 마그마가 산을 뚫고 오르듯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남자의 사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내 몸에서 분출해 솟구쳐 오르는 피를 보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럼 넌 20대 시절로 돌아가기 싫겠구나? 고종사촌 누나가 내게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아니 제일 그리운 시절이야.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지. 하고 말했다. 20대 시절 나는 강렬히 살아 있었다. 볼링장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볼이 레일을 문지르며 굴러가는 마찰이 내 가슴에 느껴졌고 꽝하고 핀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면 핀 셋팅기 내부에 있는 조그만 볼트하나하나에 전해지던 그 미묘한 고통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내 온몸은 하나의 촉수가 된 것 같았다. 물론 그 덕분에 환희와 쾌락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 오는 허무의 맛까지도 삼켜야 했다. 어릴 적 처음 내 입에 들어오던 그 말랑말랑 이상한 느낌의 돼지 비개를 삼켜야 했던 그 순간, 아버지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어쩌다 토악질 비슷한 소리라도 내면 아버지의 돌덩이 같은 손바닥이 가차 없이 내 뺨에 날아왔다. 나는 결코 뱉어낼 수 없는 허무의 맛을 참으며 삼켜야 했다. 온종일 열병을 앓았다. 어떻게 된 건지 그리움은 강렬히 살아있는 내 삶의 집착과 정비례했다. 나는 분명히 한 모금의 물도 더 빨아올리겠다는 듯, 처절한 탐욕의 나무들로 무성한 숲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한 번도 아닌 다섯 번이나 그래야 했을까? 도대체 무엇에 닿고 싶었던 것일까? 단언하건대 나는 나약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아집이 내겐 있었고, 견고한 의지도 있었다. 욕정 또한 너무나 헤퍼서 볼링장 사무실에 앉아 하루에 자위를 10번도 넘게 한 적도 있었다. 삶에서 달아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강렬히 살아있음을 느끼던 그 순간 살고 싶은 욕구가, 가슴속에 울컥하고 오르가슴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마다 내 손목을 그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다섯 번의 내 행위는 치명상이 되지 못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어두운 들판에 나가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 한복판을 쏘았다고 했다. 하지만 치명상이 되지 못한 그 상처를 안고 그는 간신히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밀밭이 바람에 일렁이고 총을 겨눌 때보다 어둡고 고요해진 밤공기가 그의 땀을 식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왜 자신의 가슴에 총을 겨누어야 했을까?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치기 어린 행동이 아니었을까? 실패한 나는 그때마다 간신히 내 삶을 이끌고 나아가야 했다. 고흐가 간신히 몸을 이끌고 나아가야 했던 밀밭 길을 나 또한 그렇게.


물오른 오징어도 괜찮아요. 아니요, 아주머니 오징어 말고요.


나는 간신히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스무 살 시절 완고한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던 이빨로 남들의 말을 으그적, 으그적 잘도 씹었지만 이제는 젊은 이빨에게 물리지는 않을까 싶은 나의 비열한 이빨은 더 이상 딱딱한 것과 맞서지 못했다.


눈은 전 보다 흐릿하여 몇 미터 앞의 사물을 알아보기 위해 찡그렸고, 떨리는 손은 겨우 눈치를 보며 입을 간신히 찾고 있었다. 하지만 코는 이제껏 맡아보지 못한 바다의 짠 내음을 들이쉬었다 뱉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코는 그 모든 것들이 쇠락해져 가는 동안 이제 드디어 태어났다는 듯, 그전에 맡을 수 없었던, 바다가 깊숙이 감추었던 그 향기를 찾아내어 음미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엄마가 떠나고 아버지와 처음 왔던 이 바다. 아버지는 나무젓가락으로 회를 집어 내 입에 넣었지만 나는 그 회 맛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엄마가 피 묻은 옷을 부엌에 던져두고 사라졌을 때도 나는 이별의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커다란 공포가 있었다면 그것이 다였을 것이다. 나는 그날 아버지가 곯아떨어진 사이 동생과 손을 잡고 오른 옥상 위에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뭔지도 모르는 그 낯선 슬픔에 우는 것도, 동생을 위로하는 것도 아닌 단 하나 공포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거였다. 와작, 와작 내 이빨에 잘근잘근 으깨지던 과자처럼, 그렇게 나는 그동안 아버지에게서 자주 맛보았던 공포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동생이 과자를 입에 넣고 오빠 참 맛있다고 할 때, 나는 공포의 맛이 내 혀를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과자처럼 으깨진 공포는 침과 섞여 위 속에 들어차고 있었다. 처음의 것들, 첫 이별, 첫맛, 그것들의 첫 고통, 첫 환희, 첫 슬픔, 첫 분노, 첫 절망은 그 순간 느낌을 주지 않는다. 당연히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첫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멀리 떠나간 다음에서야, 잊었다고 착각하는 그 순간 여명처럼 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날 나는 엄마가 내게 처음으로 준 그 이별의 맛을 알 리 없었다.


소주 한 잔을 삼키자 방금 파도가 철석이며 때린 방파제 표면처럼 위벽이 차갑게 긁혀 옴이 느껴졌다. 내 위도 저 바위들처럼 갉히고 으깨진 침식의 초라한 자태로 변했겠지. 하긴 부딪혀 물거품이 되어버린 파도를 보고 있자니 쇠락해진 내 몸을 한탄할 일만은 아니었다. 으깨지고, 쪼개지고, 그리하여 배출된 삶의 순간들, 억울하면 그 풍화된 삶들이 억울했지, 결코 위가 억울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지금은 전어 철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전어 회 한 접시를 내려놓고 돌아선 아주머니는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주머니의 이마에도 바다의 표면을 일렁이는 그런 파도가 있었다. 나는 바로 옆에서 철썩 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한 잔 들었다. 쇠젓가락이 아닌 나무젓가락으로 단지 회 한 점을 집어 든 것뿐인데, 이제 그 무게도 견디기 버거운지 내 손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끈질긴 욕정과 욕망의 뿌리를 뽑지 못한 몇 개의 이빨로 회를 씹었다. 그러자 그날 알 수 없었던 회 맛이 느껴졌다. 아니 입도 쇠락했으므로, 혀가 회 맛을 느꼈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 단지 혀는 시간의 지느러미가 정지해 물컹한 주검을 천천히 더듬어 이제는 느낄 수 없는 회 맛을 기억해 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또한 젊은 날 맛본 그 수많은 기억들이 잊히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종사촌누나의 목소리가 또다시 수평선 저 너머에서 이곳으로 밀려왔다. 늙어 간다는 것, 잊어지는 게 아냐. 각인된 흉터를 보면 알잖니. 세월이 흐를수록 그 흉터는 사라지거나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몸집 커가고 살이 붙을수록 그와 함께 커 가며 더욱 선명해지는 거야. 나이를 먹으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 상처들, 처참한 순간들, 그것들이 뿌리를 뽑지 못하고 우듬지만 잘라낸 까닭에 전 보다 더욱 키 크게 자라나는 거야. 스무 살 시절이 그리운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바위라도 씹어 삼킬 수 있다고 자만했던 그 시절, 객기, 탄탄한 근력, 그 덕분에 상처를, 기억을 금방 까먹곤 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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