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서울레이스 후기

러닝 친구를 만나다

by 달려보자go


새벽 6시 40분. 서울광장. “Seoul Race”가 새겨진 배번호를 단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청역 5번 출구로 나온 김씨는 광장을 바라봤다. 하늘색 푸마 기념 티셔츠와 화려한 싱글렛을 입은 러너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김씨는 ‘이제, 진짜 마라톤 시즌이 돌아왔구나’ 하고 실감했다. <서울레이스>는 매년 동아일보가 10월 중순 개최하는 인기 마라톤 대회이다. 청계광장 앞 세종대로에서 출발해서 동대문역에서 반환점을 돌아 청계천을 달려 무교동으로 돌아와서 골인한다.

올해 참가 인원은 총 1만 2천여 명. 하프코스는 8,500명이다. 코스가 거의 평지여서 기록이 잘 나오는 이른바 PB(Personal Best) 맛집이다. 그래서 인기가 좋다. 김씨는 운 좋게도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레이스에 나오게 되었다. 지난 6월, 의외로 손쉽게 선착순 접수에 성공했다. 아직 손가락은 늙지 않았나 보다.

대회장을 둘러본 김씨는 탈의실에서 대회 복장으로 갈아입고 물품을 맡겼다. 물품을 맡기는 데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 신속히 물품을 맡긴 탓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대회장을 여기저기 구경했다. 유튜브에서 보던 유명한 러너들이 많이 보였다. 대부분 영상보다 날씬하고 얼굴도 날렵했다. 그야말로 “런예인” 들이었다. 반가웠지만 소심한 김씨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그렇게 대회장을 둘러보던 중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김씨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를 쫓아갔다. 빠르게 옆으로 다가가 옆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혹시, 이o호?” 김씨가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어?, 김씨!”

그의 정체는 바로 김씨의 오래된 친구였다.김씨는 반가움보다 먼저 놀라움이 밀려왔다. 마라톤 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아니, 뭐야, 너 마라톤 해?” 김씨가 믿기지않는다는 듯 물었다.

“어!, 올해 2월부터.” 친구가 대답했다.

둘은 1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매년 한 번씩은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 사이였다.

김씨는 친구의 배번호를 살폈다.

B조. 김씨와 같은 조였다.

“하프코스 기록이 얼마야?” 김씨가 물었다.

“1시간 37분.” 친구가 대답했다.

“뭐? 1시간 37분?, 아니 올해 2월에 시작했는데, 기록이 그렇게 좋다고?”

김씨는 충격에 빠졌다.

‘2년간 열심히 달린 나와 기록이 같다고?’

그때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둘은 함께 B조 출발선에 섰다.

“난 1시간 35분을 목표로 달릴 거야, 너는?” 김씨가 친구에게 물었다.

“응, 난 네 뒤를 따라가 볼게. “

친구의 말에 김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가보자! 파이팅!”

잠시 내렸던 비가 완전히 그쳤다. 시종일관 흐린 날씨였지만 시원해서 달리기에 나쁘지 않았다.

코스, 날씨 모든 게 좋았다. 핑곗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씨는 선글라스를 쓰며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PB를 달성할 것이다.’ 김씨는 속으로 다짐했다.

수천 명의 러너들이 동시에 몸을 앞으로 던졌다.


코스는 작년과 달리 조금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경복궁을 한 바퀴 도는 코스가 사라지고, 종로를 달려 동대문역에서 반환해서 숭례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변경됐다. 결과적으로 초반에 약한 업힐 대신 넓은 평지를 달리게 되었다. 러너에게 유리한 코스다. 예상대로 레이스 초반 병목은 넓은 주로 덕에 작년보다 현저하게 줄었다. 이제까지 서울에서 달렸던 대회 중에서 가장 쾌적하고 쉬운 코스였다.

레이스 전략은 초반 3킬로미터까지는 4분 40초 페이스로 달리고 이후에는 4분 30초 페이스로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마지막에 힘이 남는다면 스퍼트를 해서 1시간 35분대로 들어오는 게 기록적인 목표다. 물론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계획대로 달린 대회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김씨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계획은 세우고 있다.

이번 레이스에서 집중하는 첫 번째는 “리듬”으로 달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리듬있게 달려서 일정한 페이스와 심박을 유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착지 시 바닥을 쿵쿵 찍지 않고 발을 딛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을 구르면서 충격을 뒤로 흘려주는 것이다. 마치 영화 <태극권> 처럼 상대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보내는 것이다.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러닝은 자신만의 체형과 심폐능력에 따른 주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김씨의 러닝 철학이다. 쉽게 말해서 사뿐사뿐 부드럽게 그리고 너무 숨차지 않게 달리고 싶다는 이야기다. 풀코스를 부상 없이 최대한 경제적으로 달리기 위한 나름의 전략인 것이다.


레이스를 시작하고 김씨는 친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앞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멀지 않은 뒤에서 페이스에 맞춰 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일정한 페이스로 끌어야겠다.’ 김씨는 차분하게 마음먹었다.

‘페이스를 둘쭉날쭉하게 달려서 친구의 레이스를 망칠 수도 있다.’

항상 혼자 달리던 김씨는 약간의 부담을 느꼈다. 페이스메이커들은 부담이 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동대문역을 향해 달려 나갔다. 러너들의 숨소리와 발소리만이 가득했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는 선두권 선수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모두 개인 최고기록을 기대하며 달리는 듯했다. 김씨도 집중했다. 오늘은 사진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기록과 친구와의 동반 레이스에 집중했다.

3킬로미터 지점 돌파. 계획했던 4분 30초 페이스에 도달했다.

‘이제, 지금 페이스로 끝까지 달린다.’ 김씨는 손목에 시계를 봤다. 심박수 145.

안정적인 심박수와 리듬의 궤도에 올랐다. ’오늘 해볼 만하다.’ 김씨는 자신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친구는 잘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디 있니, 너는’


13킬로미터 지점. 뒤에서 헉헉대며 누군가 김씨 뒤에 바짝 붙었다. 김씨는 4분 30초 페이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일정한 페이스를 달리는 김씨를 누군가 페이스메이커로 삼은 것이다. 김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나만 따라오세요. 오늘 컨디션이 제법 괜찮습니다.’

김씨는 누군가 자신에게 의지해서 달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은 호흡이 아주 편하게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섣부른 자부심을 느꼈다.


17킬로미터 지점. 4분 30초. 전체 평균 페이스는 4분 32초. 뒤에서 함께 달리던 러너는 15킬로미터 급수대 이후 사라졌다. 다시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친구의 존재도 잊은 지 오래다. 아마도 많이 쳐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4킬로미터가 남았다. 현재 속도로 달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지금 페이스로 들어가도 개인 최고기록을 눈앞에 두었지만 김씨는 1시간 35분에 집착했다.

김씨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를 말렸어야 했다. 결국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페이스를 올렸다. 팔치기를 크게 하고 보폭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순식간에 랩페이스가 4분 17초까지 올라갔다. 앞서 달리는 거의 모든 주자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예상대로 너무도 빨리 에너지가 소진됐다. 허무하게 그 속도로 1킬로미터밖에 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8킬로미터 지점에서 다시 4분 33초 페이스로 뚝 떨어졌다. 심박수가 불규칙해지고 리듬은 완전히 깨졌다.

‘아, 이게 아닌데, 일단 지금 속도로 완주만 하자.’

김씨는 후회했다. 라스트 스퍼트라는 것은 마지막 500미터만 하자고 생각했다.

20킬로미터 지점 표지판이 보였다. 이제는 정신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김씨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다 왔다!, 힘내자!” 잊고 있던 친구였다.

김씨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레이스가 부끄럽고 퍼져서 겨우 달리는 모습이 창피했다.

“먼저 가라! 나는 퍼졌어ㅠ” 김씨는 힘겹게 말했다. 친구를 향해 다시 한번 외쳤다.

“나는 틀렸어! 힘이 남았으면 더 달려!” 그제야 친구는 힘을 내서 앞으로 나갔다.

김씨도 있는 힘을 다해 친구 뒤에 붙었다. 하지만 이미 힘을 다 썼다.

그런 것이다. 한정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썼어야 했다.

17킬로미터 지점에서 풀액셀을 밟아서 기름을 다 썼다. 주유등에 불이 들어와서 멈추기 직전이다.

김씨는 멀어져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지금도 좋은 기록이지만 김씨의 마음은 이미 패배했다.

기념사진이고 뭐고 침울한 마음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잠시 후 기록을 알리는 카톡이 왔다.


1시간 36분 00초!!!!!

엥???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1초만 빨랐어도 1시간 35분대였구나. 17킬로미터 지점에서 이상한 짓만 안 했어도 그냥…….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친구와 다시 만났다. 기념사진을 함께 찍고 대회장 옆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의 기록은 1시간 35분 47초. 그는 기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들어보니 레이스 내내 김씨의 달리는 모습을 보며 달렸다고 했다. 폼이 가볍고 좋다고 부러워했다. 김씨는 조금씩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러닝 기록 좀 보여줘 봐.” 김씨는 친구의 레이스 기록을 살펴봤다.

데이터를 보고 김씨는 기겁했다. 평균 심박수가 170대이고 최대 190까지 올라갔었다. 김씨는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쉽게 말해서 굉장히 강도가 높게 달린 것이다. 그에 비해 김씨의 평균 심박은 140대 중반.

‘아, 심박에 차이가 있었구나.’ 김씨는 생각했다.

‘그래도 대단한걸, 나는 심박이 170대면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물어보니 원래 항상 이렇게 빡런을 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심장에 너무 무리를 주면서 달리는 거 같다. “

“나랑 주말마다 같이 달리자.” 김씨는 친구에게 제안했다.

“나도, 좋지.”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김씨와 친구는 주말에 함께 달리기로 했다.

“내가 러닝클래스에서 배운 스트레칭이랑 훈련 방법들을 알려줄게.”

김씨는 우울한 감정이 거의 사라지고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라톤을 하는 친구를 처음 만난 그는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다.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김씨는 지하철을 탔다. 대회를 복기하는 루틴을 반복했다. 개인 최고기록을 갈아치웠고, 러닝친구를 만났고, 부상도 없었다.

다 좋았다. 다만, 오늘도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

돌발행동은 어디까지나 하프코스까지만 허용된다. 풀코스에서 이런 짓을 하면 반드시 걷게 될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김씨는 친구와 아름다운 러닝 코스를 함께 달릴 생각을 하니 거의 콧노래가 나왔다.

‘달리고 나서 한강 라면 한번 먹여줘야겠군, ㅋㅋ’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달리는 한강코스와 벚꽃이 만개한 팔달산 코스가 떠올랐다.


그런데 진짜 “재능충”이 있긴 있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나는 노력파였구나.’


서울레이스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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