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나요?

농구를 좋아하던 아이

by 달려보자go


드라마 마지막승부와 슬램덩크가 대한민국을 강타하던 1990년대 중반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95년 2월. 농구대잔치에서 12승 전승의 연세대학교와 11승 1패의 고려대학교의 정규시즌 1위를 위한 경기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전후반 명승부를 이끌어 왔던 경기는 서장훈의 버저비터로 연세대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당시 연세대 농구선수들의 인기는 연예인보다 많던 시절이었다. 오빠부대라는 말도 그때 처음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에 살았다. 아파트 옆 라인 1층에 경향신문을 배달하는 집이 있었는데 삼 형제가 살았다. 제일 큰 형이 중학생쯤으로 기억되고 막내형은 나보다 3살이 많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계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형들을 따라 신문배달을 같이 했다. 배달하는 양은 그때그때 달랐다. 형들이 운전하는 노란색 신문배달 자전거 뒤에 타고 다니다가 재빠르게 뛰어내려 배달을 마치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는 식이었다. 배달시간은 1~2시간 정도로 기억한다. 그 시절 주공아파트는 5층 짜리 건물로 당연하게도 엘리베이터 따위는 없던 시절이어서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뛰어다녔다. 성장기에 계단을 뛰어오르는 행위는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점프력 훈련이 된 것으로 믿고 있다. (훗날 고등학교 시절 서전트 점프를 1미터가량 뛰었고 제자리멀리뛰기는 295cm를 뛸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신문배달을 마치면 형들 집으로 달려가서 화장실에서 발부터 닦았다. 형들의 어머니는 남자 4명의 꼬랑내를 참을 수 없어서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발부터 씻도록 단단히 교육을 시켰다. 발검사를 마친 사람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엎드려서 혹은 누운 편한 자세로 비디오를 봤다. 주로 홍콩 무협 영화를 봤다. <의천도룡기>, <신조협려> 등 시리즈물을 많이 봤는데 언젠가 한번 <천녀유혼>을 본 날 왕조현의 비현실적 미모와 몽환적인 영화 분위기 때문에 며칠간 후유증을 앓았다.


삼 형제의 특이할만한 점은 모두 키가 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농구를 잘했다. 형들이 농구를 하러 갈 때면 나는 쫓아갔다. 그리고 막내 형에게 드리블 같은 농구의 기초를 배웠다. 당시 키가 130cm 정도였던 나는 농구공을 골대까지 던지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드리블을 일단 배워야 했다. 아버지를 졸라서 문구점에서 파는 제일 싼 농구공을 하나 샀는데 나중에 껍데기가 벗겨질 때까지 썼다. 그 공을 혼자 튀기면서 형들이 농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언젠가 나도 커서 농구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놀라운 점은 삼 형제 중 가장 농구를 못하던 막내 형이 농구선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 대경상고 주전가드가로 활약하며 졸업을 앞둔 1995년 춘계고교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대단하던 고려대학교 농구부에 입학했다. 나중에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연고전을 보러 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그 형을 마주쳤다. 서로 깜짝 놀랐다. 너무 정신이 없어 간단히 인사만 나눴지만 어쩐지 형의 얼굴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2년 선배인 주전 가드 신기성 선수가 버티고 있어 형은 주로 벤치에 대기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계속 농구를 해서 고대를 졸업하고 프로팀 삼성에 입단했고 은퇴 후 농구코치로 제자들을 키우고 있다는 기사를 2017년에 마지막으로 봤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92년 안양 평촌으로 이사를 왔다. 안양으로 가서도 농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키는 여전히 작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에 키가 164cm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작은 키는 농구에서 불리하다. 다행히 탄력과 스피드가 신장의 열세를 어느 정도 만회 해주었지만 농구에는 “키”라는 재능의 벽이 너무 높았다. 겨울방학이 다가올 즈음 키를 키우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엄마에게 남양 3.4 분유를 사달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우유 500ml와 함께 분유를 먹었다. 그냥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고 우유에 타먹기도 하고 생각나면 먹었다. 그렇게 겨울방학 내내 먹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6cm가 컸다. 졸업 사진을 보면 교복 바지 밑단이 복숭아뼈 한참 위에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신체검사에서 나는 당당하게 170cm를 넘었다. 기껏해야 2cm 정도 나보다 커서 약을 올리던 친구를 내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170대의 남자가 된 것이다. 커진 키만큼 점프력이 좋아지고 농구에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는 학교 농구 동아리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마다 농구 동아리가 있을 정도로 농구가 인기가 많았다) 나는 농구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망의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안양시 미륭배 5대 5 농구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안양, 과천, 의왕 지역의 고등학생 농구팀이 맞붙는 길거리 농구대회였다. 많은 팀들이 대회 출전을 신청했고 조별리그를 거쳐 토너먼트 경기를 펼쳤다. 대회장은 선수들과 응원을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엄청난 함성의 응원을 받으며 치열한 경기가 며칠간 이어졌다.

대회 결과는 조별리그를 힘겹게 통과했지만 8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우리들은 고3을 앞둔 겨울, 마지막 대회로 수원을 찾았다. 최선을 다했고 최종 4강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우리들의 도전은 고3 수험생이라는 현실 앞에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스포츠에 도전했던 값진 경험은 평생 기억에 남았다. 가슴이 뛰던 기억.


그 고등학생이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마라톤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그때보다 더 열정적 일지 모른다. 일주일 뒤 jtbc마라톤 풀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지난여름 흘린 땀방울들을 믿는다.

다시 가슴이 뛴다.

“나의 영광의 순간은 아직이다.”

1997년 2월, 수원. 슛을 쏘는 고등학생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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