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 JOURNEY 마지막 여정
김씨는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아내와 아이들이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5시. 어두운 방에서 김씨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은밀히 외출 준비를 했다. 상의를 탈의하고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볼살이 쏙 빠져서 안 그래도 긴 얼굴이 더욱 길쭉해 보였다. 옆구리에는 군살이 전혀 없고 팔을 들어 올리자 갈비뼈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슴이 납작하게 들러붙었고 팔의 삼두근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달리기에 필요하지 않은 부위는 퇴화된 듯 효율적인 몸이었다. 몸매만 봤을 때는 서브 3(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이내 완주하는 것) 러너의 모습이었다. 문제는 하체였다. 4분 초반대로 달리기에는 아직 하체 근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김씨도 알고 있었다.
‘올 겨울에는 업힐 훈련을 집중적으로 해서 강한 허벅지를 만들겠어.’
김씨는 홀쭉해진 얼굴을 만지면서 생각했다.
김씨는 경주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서 어제 가족들과 기차를 타고 경주에 내려왔다.
단풍이 물든 경주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다. 경주는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무려 30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당시 천마총 앞에서 사진을 찍던 장면과 관광버스를 타고 불국사를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갔던 기억만 남아있다.
숙소는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경주시민운동장과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련했다. 올 초에 생긴 신축 비즈니스호텔로 시설이 깨끗했다. 김씨는 숙소를 나와 대회장까지 걸어갔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다. 공주백제마라톤, 서울레이스, 경주마라톤까지 3개 대회 연속 비가 오는 날씨다. 이제는 비가 지겨울 지경이다.
가는 길에 러너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대회장에 도착하자 역시나 엄청난 인파에 압도됐다. 오렌지색 기념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온통 주황 물결이었다. 동아마라톤 멤버십을 신청한 참가자는 일반참가자와 별도로 경주실내체육관에서 탈의실을 사용하고 물품보관과 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제한된 인원만 사용하다 보니 화장실도 여유가 있었고 물품 보관도 신속하게 맡겼다. 체계적으로 운영이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대회는 기록보다는 2주일 후에 있을 JTBC마라톤 대회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달릴 생각이었다.
김씨는 C조에서 출발 준비를 했다. 대회는 10킬로미터, 하프, 풀코스가 함께 출발했는데 초반 병목현상이 무척 심했다. 특히 5킬로미터 지점 첨성대 부근은 너무 좁은 주로 탓에 전혀 속도를 내지 못했다. 미련 없이 기록은 포기했다. 병목은 10킬로미터 지점을 지나서야 풀렸다. 코스는 대부분 평지여서 달리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경주마라톤은 사물놀이패의 응원이 인상적이었다. 서울대회에서는 짤랑대는 종소리 응원이 많은 반면 경주는 사물놀이 응원과 지역 주민들의 응원이 눈에 띄었다. 마치 경주에 온 손님들을 맞이해 주는 느낌이었다.
경주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유적지를 달리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14킬로미터 정도를 지나자 결국 비가 오기 시작했다. 레이스가 마무리될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기록은 1시간 38분. 무난한 기록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런저니 메달.
동아마라톤에서 개최하는 서울, 공주, 경주마라톤을 모두 완주한 러너에게 런저니 메달이라는 것을 준다. 메달이 크고 예뻐서 이 메달을 받기 위해 멤버십을 신청하는 러너도 많다고 한다. 김씨도 런저니 메달에 각인까지 하고 포토존에서 사진까지 찍었다. 혼자 대회를 다니는 입장에서 포토존에서 누군가에 사진을 부탁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아마라톤은 사진을 찍어주는 서포터가 있어서 고맙게도 용기를 냈다. 경주마라톤은 대회 운영도 좋고 런저니 메달에 포토존 사진까지 이것저것 소득이 있었다.
경주에서 또 한 번 좋은 추억을 만들고 집으로 향했다. 여행을 겸해서 지역 대회를 참가는 것도 마라톤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