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JTBC서울마라톤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

by 달려보자go

11월 2일 일요일 새벽 6시 30분, 월드컵경기장역에 열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출구는 금세 인파로 막혔다. 이른 새벽 낯선 지하철 풍경에 몇몇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개찰구를 나오자 이미 마라톤 참가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행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이들, 대회복장으로 옷을 갈아입는 이들로 주변은 북적거렸다. 나도 적당한 구석을 찾아 대회 복장으로 갈아입고, 역을 빠져나왔다. 아직 날이 어둑했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 뒤,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오늘이 왔구나’ 하고 실감했다.

다시 찾은 JTBC서울마라톤

JTBC 서울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 1년 만에 다시 상암월드컵경기장 앞에 섰다.

작년 가을 이곳에서 처음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다. 낮기온이 2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 레이스를 펼쳤는데, 입이 바짝 마르고 얼굴에서 소금기가 나올 정도였다. 후미 조에서 출발한 주자들은 막판에는 생수가 떨어져서 물도 못 마시는 상황도 있었다. 결국 완주에는 성공했지만 풀코스의 매운맛을 봤다. 38킬로미터 지점 부근에서 말로만 듣던 에너지 고갈 현상을 몸소 체험했다. 이후 걷다 뛰다를 반복해서 겨우 결승선을 통과했다. 4시간 6분, 첫 풀코스 치고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후반부에 8분이나 되는 시간을 걷는 바람에 목표했던 서브 4는 무산됐다. 41킬로미터 부근 언덕을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 올라갈 때의 참담한 심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이다’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난 1년간 2,400킬로미터를 달렸고, 지난 3월에 있었던 서울동아마라톤에서 3시간 48분으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무더웠던 여름에도 오늘을 위해 새벽 5시에 홀로 묵묵히 트랙을 달렸다.

오늘 목표는 3시간 30분. 킬로미터당 평균 페이스 4분 58초. 하프코스 최고 기록 평균 페이스가 4분 30초 반대이니, 킬로미터당 30초가량 여유가 있다. 보다 완벽한 페이스 관리를 위해 왼쪽 손목에 네임펜으로 구간별 목표 누적 시간을 적어놨다.

5km 24분 35초

10km 49분 10초

15km 1시간 13분 45초

…………..

40km 3시간 16분 40초.

전략은 단순했다. 이븐 하게 페이스 유지. 혹시 주변에 3시간 30분 페이서가 있으면 따라갈 생각이었다.

나는 손목의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천천히 대회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영상 7도, 맑고 바람 하나 없는 청명한 가을 아침. 게다가 화장실도 신속하게 다녀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간이 화장실 대신 난지공원 안쪽 화장실을 이용한 덕분이다. 워밍업도 충분히 마치고, 출발 20분 전에 C그룹 출발선에 섰다. 며칠 동안 잠들기 전 상상하던 장면들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자 묘한 전율을 느꼈다. 오늘 레이스도 계획대로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이었다.

목표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섰다. 8시에 엘리트와 마스터즈 A그룹이 출발했고, 우리 C그룹은 8시 7분에 출발했다. 드디어 레이스가 시작됐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시원했다. 유튜브로 공부했던 그 코스가 실제 풍경으로 펼쳐졌다. 수천 명이 함께 달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러나 감격할 틈도 없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에너지젤과 식염포도당을 넣기 위해 찬 러닝 벨트가 하프 타이즈의 매끄러운 재질 탓에 고정되지 않고 자꾸 배꼽 위로 말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러닝 벨트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아… 마라톤은 역시 쉽지 않네.’

달리면서 계속 러닝 벨트를 고정시키려 애써야 했다. 하프 타이즈와 러닝 벨트 조합을 미리 테스트했어야 했다. 이 사소한 장비 하나 때문에 레이스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정말 문제가 심해지면 그냥 러닝 벨트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3km 지점에서 양화대교 위에 올랐다. 배번호가 세차게 펄럭였다. 다리를 건너자 도로 폭이 좁아졌다. 이번에는 요리조리 주자들을 피해서 달리지 않고 적당히 속력을 늦췄다.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달렸다. 오히려 그 덕분에 오버페이스를 피할 수 있었다. 여의도에 들어서자마자 열렬한 응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내요! 힘내!!” 여성 목소리가 유난히 많았다. 귀가 따갑도록 열정적인 응원에 나도 모르게 페이스가 올라갔다. 응원이란 게 이런 힘이 있다. 7km 돌파. 4분 50초 페이스. 계획대로 레이스가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귀찮던 러닝 벨트도 골반에 고정이 되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에너지젤 하나를 먹고 마포대교로 향했다. 두 번째로 한강을 건넜다. 역시 대교 위 바람이 거셌다. 이제 병목은 없었다. 탁 트인 다리 위를 시원하게 달렸다. 평균 페이스 4분 57초. 출발 후 약 한 시간, 애오개 인근에서 긴 오르막을 만났다. 기어를 바꿨다. 보폭을 줄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에코 모드로 묵묵히 올랐다. 오늘 코스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 첫 번째 고비였다. 페이스는 5분 20초까지 떨어졌다. 언덕을 넘고 크게 숨을 내쉰 뒤 회복하듯 내리막을 내려갔다. 이후로는 잠시 평탄한 구간. 힘든 코스 사이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23km까지 리듬을 살리며 4분 50초대를 유지했다.


25km 부근에서 다리가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이른 시점의 불길한 느낌이었다. ‘오늘… 쉽지 않겠는데.’

건대입구 근처에서 본격적으로 힘들어졌다. 작년엔 35km부터 급격히 힘이 빠졌는데, 올해는 더 일찍 찾아온 위기였다. 불안함을 안고 잠실대교에 올라섰다. 거기엔 또 엄청난 응원 인파가 있었다. 한 여성 응원자가 작은 약통 같은 병에 레몬맛 음료를 담아 건네주어 감사히 받았다. 맛도 좋고, 실제로 힘이 됐다.

대교를 내려와 우측으로 꺾었다. 32km부터 페이스는 5분 20초대로 떨어졌다. 학여울로 향했다가 반환점을 나올 즈음, 몸이 급격히 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년의 악몽이었던 38km 지점에 도달했다. 역시 올해도 버티기 쉽지 않았다. 이미 3시간 30분 목표는 멀어졌고, 목표를 수정했다.

‘걷지만 말자.’

괴로운 시간이 다시 시작됐다. 다리가 너무 무거워 한 발 한 발을 겨우 옮겼다.

‘아, 내가 왜 이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지…’

‘이제는 기록을 좇지 말고 그냥 즐기면서 달려야 하나…’

하지만 41km 오르막을 오르던 순간, 소리 내어 외쳤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주책맞게 뭔 일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힘이 됐다.

그렇게 한 번도 걷지 않고 결국 결승선에 들어왔다.

기록은 3시간 40분.

세 번째 풀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목표였던 3시간 30분은 실패했지만, 걷지 않고 완주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또다시 걸었다면 충격이 꽤 있었을 것 같았다. 마라톤은 역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무거운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역으로 향하는 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무엇이 부족했을까?’

답은 명확했다.

장거리 훈련 부족. 여름 동안 35km 이상을 달리지 못했다. 스피드 훈련에 치중한 나머지 장거리를 소홀히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마라톤 재밌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훈련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 그게 마라톤의 잔인함이자 매력이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11월 23일, 이번 시즌 마지막 대회가 남아 있다.


인천마라톤 풀코스.

그곳에서 다시 한번 3시간 30분에 도전할 것이다. 오늘이 장거리 훈련이 된 것이다.


마라톤은 참,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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