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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리케 Jul 27. 2021

#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데스노트, 이번엔 제 차례네요..

  나는 비정규직 근로자이다. 나라 정책을 만드는 높은 분들도, 국가대표 축구 감독님들도, 높은 연봉을 자랑하는 대기업 임원분들도, 일부 초엘리트 연구원분들도 기간이 정해진 계약직 근무자이긴 하다. 나와 클.라.쓰.가 다르긴 하지만.  


  나의 직장은 그런 높은 분들과, 그렇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과, 큰 잘못이 없다면 웬만하면 정년을 채울 수 있는 분들이 어우러져 일하는 곳이다.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산책하고, 수년간 허리디스크를 치료해준 능력 있는 한의사분이 있고, 저렴하고 맛있는 구내식당이 있는,  근무 여건이 참 좋은 곳이다. 여기서 이십 년 가까이 일했고, 내 푸르른 나날과 익어가는 나날을 보냈다.


  나와 같은 직군의 동료들은 오랜 시간 함께 일했다. 함께 웃고 울고, 때론 뒷담화도 하며 같이 늙어갔다. 모두 수년 후 퇴직을 계획했으나 갑자기 닥친 강제 퇴직 소식에 망연자실했다. 우리는 각자의 계약 기간이 달랐기 때문에 계약 기간이 끝나는 순서대로 퇴사하게 되었다. 계약 기간에 따라 나의 퇴사는 근무 계약이 끝나는 내년 6월로 정해졌다.


  퇴사의 이유는 회사 예산의 효율화, 관리의 용이함이라 건너 건너 전해 들었다.


  "우리는 도구였구나."


  "다른 분들도 모두 다 도구야.

   우린 좀 더 낮은 도구인 거지."


  씁쓸한 대화가 오간다.


  근무자 단톡방에서 한 명씩 한 명씩 나간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한 명씩 사라져 간다. 퇴장은 몇 달간 이어졌고, 지난달에는 세명의 동료가 퇴직했다. 세 번째 동료는 '이번엔 제 차례네요'라는 말과 안부인사를 남기고 단톡방을 나갔다. 데스노트가 따로 없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사람이 죽음을 인지하는 단계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이 단계 단계들을 차분히 밟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수용의 단계이다. 여기에 짜증과 무기력도 조금 첨가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바로 '새로운 계획'이다. 누군가는 동종 업계의 다른 직장을, 누군가는 새로운 학업을, 누군가는 외국에서 1년 살기를, 누군가는 시험 준비를, 누군가는 결혼 준비를 하며 각자의 삶을 새롭게 채워가려 하고 있다.


  '새로운 계획'에서 나는 직장생활보다는 다른 방식의 수익 창출과 파이어족으로의 조기 은퇴를 꿈꾸고 있다. 때로는 새로운 삶에 설레기도 한다. 아직은 가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하며 지지해주는 소중한 가족들이 있고, 내 삶을 소중히 가꾸려는 마음이 있다.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 힘들긴 하겠지만, 기꺼이 맞이하고 싶다.


  나의 보물인 가족들과 국내외 여러 곳에서의 한 달 살기를 꿈꾸며,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의 일과 삶을 꿈꾸며 오늘 밤 웃으며 잠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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