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복숭밤 Aug 25. 2023

한 땀 한 땀의 마법

23/03/14


작년 가을부터 여섯 개의 뜨개옷을 만들었다. 녹색 카디건 하나, 풀오버 셋, 선물용 조끼 둘. 나뭇가지에 하나둘 부풀어 오르는 꽃눈은 뜨개질 작업을 슬슬 마무리해야 한다는 신호다. 지금 뜨고 있는 스웨터만 완성하면 다시 날이 선선해질 때까지 긴 뜨개 방학에 들어갈 것이다.


이번 시즌 마지막 작업물로는 카라가 예쁘게 벌어지는 남색 스웨터를 일찍부터 골라 두었다. 까다로운 기법들을 꼼꼼히 숙지하고 2월 초순에 바로 코를 잡았다. 녹초가 되는 날이 잦긴 했어도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소매 작업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나버렸다. 바로 4mm 뜨개바늘이었다.




대바늘로 뜨는 스웨터는 바늘 크기에 따라 작업 속도가 크게 좌우된다. 통통한 실을 굵은 바늘로 뜨면 비교적 금방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만, 얇은 바늘을 썼을 때의 촘촘하고 가지런한 느낌은 기대하기 어렵다. 내 경우엔 보통 4.5mm나 5mm 바늘을 선호하는데, 이번 작업엔 그보다 작은 바늘을 쓰게 되면서 여태 쇄골 언저리에 머무는 것이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다시 스웨터를 꺼냈다. 옷깃 부분의 앞섶을 만들 차례였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 듣기 위해 비밀보장 400회 영상도 찾아 틀었다. 한 코 한 코 차분히 실을 넘기며, 송은이, 김숙, 그리고 게스트 유재석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세 사람의 오래전 추억담이 이어졌다. 10분짜리 코미디 코너를 짜기 위해 오전 열 시에 모여 새벽 두 시까지 회의를 하고, 연습을 하도 많이 해서 무대에서는 틀린 적이 없던 날들.




"이런 좋은 시절을 보낼 줄 몰랐어요."



유재석의 목소리에 손을 멈추고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기, 불안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열심이었다고 했다. 송은이가 맞장구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공이 생긴 것 같다고, 엉덩이를 붙이고 지구력 있게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같다고.


세 사람의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의 과거였다. 그간 방송에서 종종 언급된 적 있는 일화였는데도, 이번엔 왠지 코끝이 찡했다.


뭐라도 해보자. 그건 이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했던 말이었으니까.


일상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날들이지만, 서로의 글을 믿으며 용기를 냈다. ‘지금’, ‘쓰고 있다’는 감각을 동력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엉덩이를 붙이고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한다. 글자를 모으고 문장을 다듬는 요즘의 저녁이, 연습과 고민으로 불안을 재우던 세 예능인의 과거와 겹쳤다. 녹녹하고 뭉클한 기분.


                                  

다시 뜨개질로 돌아와, 그 사이 카라 스웨터는 아주 조금 자라났다. 아래 고무단까지 뜨려면 며칠이 더 걸리겠지만, 어려운 앞섶 부분을 (무려 2.5mm 바늘로) 무사히 완성했다.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안다. 엉덩이를 붙이고 지구력 있게. 한 땀 한 땀 뜨다 보면 멋진 스웨터가 완성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드라마를 좋아하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