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7
초등학교 때는 방학마다 외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름엔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겨울엔 더 신나게 썰매를 탔다. 고봉밥과 과일을 잔뜩 먹고 배가 아프게 웃었다. 만수시장엔 그때 자주 갔었다. 외할머니의 손을 나눠 잡고 시장 골목을 돌아다니며 기름 냄새를 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방구 구경을 하고 싶어 얼마나 안달이 났던지.
올해 외할머니 생신날엔 내가 케이크 당번을 맡았다. 시장 빵집에서 케이크를 고르던 중 명절마다 가족들이 커피를 찾았던 기억이 나 이참에 사 가기로 했다. 300m 남짓, 카페로 가는 길엔 올 때마다 들르는 과일 집과 눈에 익은 가게들이 보였다. 머리띠를 한 아이가 동생처럼 보이는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롯데리아를 지나쳤다.
누구나 그렇지만 어렸을 땐 비합리적인 생각이 많았다. 다들 나처럼 오른발등에 흉터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모들과 외삼촌도 당연히 있는 줄 알았다. 세상에 시장이란 오로지 만수시장만 존재하고, 어른들은 슬프거나 지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러고 보면 ‘무안’이란, 내 머릿속의 생각들이 도리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 처음 알아채는 감정이 아닌지.
아무튼 이건 아직 비합리적이고 순수한 생각 속에 지낼 때의 이야기다. 그런 시절에도 내가 첫째라는 자각은 뚜렷하게 있었다. 나에겐 동생이 있고, 같이 놀고 싸우고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는 감각. 어느 날엔가는 화가 많이 났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동생이 미웠고, 그럼에도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롯데리아에 데려가 종이돈을 꺼냈다. 내 투박한 사과에 동생은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치즈스틱을 먹었다.
잘 삐치고 주눅도 잘 들고, 그러다가도 금방 킬킬거리는 동생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얘가 초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등교 첫날, 집에 친구들을 데려왔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동생은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라는 걸. 씩씩하고 재밌고,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가 바로 내 동생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글을 덮어두었다. 내가 정말 더 쓰고 싶은 건지, 계속 쓴다면 도대체 어떻게 끝낼 것인지, 나도 나를 알 수 없었다. 슬픔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다른 이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예기치 않게 침투하는 기억에 마비되고, 어떻게든 기억을 붙잡으려 쩔쩔맸다. 그러는 사이 또 새봄이 왔다.
훌쩍 오른 기온에 놀라며, 다시 또 기일이 오는 것을 실감하며, 조금 걸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되었구나. 정용준의 <미스터 심플>을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내 일 같지 않은 일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것. 그 세상은 몇 만 년 전부터 여기 존재해 왔지만, 나에게는 이제야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 속의 쓸쓸하고 먹먹한 문장 앞에서, ‘알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다. 삶의 한복판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