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1
퇴사까지 딱 열흘이 남았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2년을 꽉 채워 일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시간이 빠르다는 진부한 말을 이렇게 또 하게 된다. 마지막 달은 유달리 더 빠르게 지나는 것 같다. 학기 초라 신경 쓸 일이 많기도 하지만, 그동안 맡았던 일들을 잘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업무인계를 마무리하고, 틈틈이 송별 모임 약속을 잡는다. 그러면 정말 끝.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직을 준비했다. 인수인계서를 착실히 만들었고 채용 공고를 찾아다니며 가슴을 졸였다. 내내 뒤숭숭했던 마음은 1년 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는데, 일이 손에 익어서인지 단순히 시간이 흘러서인지는 모르겠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러 입맛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걱정도 자꾸 하면 내성이 생기는 법. 작년 말부터는 아예 마음을 놓았다. 늦잠도 실컷 자고, 실업급여도 받고, 천천히 다음을 계획하지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내 뜻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 해도 무 자르듯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 것이다. 3월 초 주변에서 이런저런 일자리 소식들이 들려왔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지원 서류들을 꾸리고 있었다.
K가 말했다.
"불확실한 행복이 아니라 확실한 불행을 택하는구나.”
사실 입사 초기, 몰래 분주히 공고들을 찾았을 때도 지원까지 진행한 경우는 손에 꼽는다. 왠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든가 채용 일정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벽은 자기소개서였다. 지원 동기를 쓰라고? 저는 그저 안정적인 수입과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업무를 원하는 데요.
글쓰기야 뭐 항상 어렵지만, 이건 단순히 장르가 다른 문제는 아니었다. 매끄럽게 나를 포장하되 분량에 맞게 간략히 잘 써야 한다. 술술 읽혀야 하지만 아름답고 보송보송한 문장까지는 필요치 않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기서도 나름의 공식이 있었다. 예컨대 자기소개는 성과가 명확하고 직무 연관성이 높은 경험을 써야 한다든가, 지원 동기는 내 장점과 이 회사만의 특징을 조합해서 써야 하는 것이다. 조금씩 빈칸을 채워나가며, 자기소개서가 오히려 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를 만들기 위해 지원 회사의 내력을 샅샅이 공부하고, 성과를 쓰기 위해 그간의 경험을 조립하는 나.
며칠 동안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또 고치며 느낀 건, 그래도 지난 2년이 허튼 시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긴 방황 뒤,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들어오게 된 자리였다. 여기서 일하며 만난 인연들, 그동안의 고군분투가 글자들 속에 들어차 있었다. 이 자기소개서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건 정말 느긋하게 지켜보기로 한다. 2년 사이 나는 또 이만큼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