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8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딱히 즐겨 보진 않지만 관심을 거두지도 않는 사람. 어떤 작가가 집필하는지 무슨 배우들이 나오는지 귀를 열고 지내다 이거 재밌겠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소식을 듣지 않는 사람. 그러다 어느 날 밤, 불현듯 시작 버튼을 누르고는 드라마 속 세계에 몇 주 동안 푹 잠겨 지내는 사람.
올해 초 소셜 미디어들이 온통 <더 글로리>로 도배된 것처럼 작년 봄엔 다들 구 씨 일색이었다. 대체 구 씨가 뭔데, 하며 누른 짤막한 영상에서 나는 외려 상대 배우의 눈과 호흡에 설득당했다. 그날부터는 드라마가 잘 끝나기만을 바랐다. 서사와 연출이 처음의 정성과 집중을 잃지 않기를.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 둘째 주, <나의 해방일지> 16회를 내리 달렸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꿈에서는 미정과 가족들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깨어 있는 낮 역시 희미하게 소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첫 화의 마지막, 능소화를 배경으로 미정과 구 씨가 마주한 장면을 기억한다. 울창한 초록과 불안한 눈동자들. 아름답고 궁금했다. 그 마음을 이기고 치대며 연말을 보냈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세상엔 읽고 보고 느끼고 싶은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드라마는 길어도 너무 길다. 다음 회를 보기 위해 한 주를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고, 차곡차곡 쌓은 기대가 종반부에서 와르르 무너질 때의 허탈감이란. 요즘엔 사전 제작 작품이 늘어나 그런 경우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다시 드라마를 찾게 되는 건 당연히, 재밌기 때문이다. 개연성과 핍진성을 촘촘히 쌓아 올린 이야기를 만나고, 열 시간 넘게 작품의 인물과 서사를 따라가며 내 감정 역시 고조시키는 것. 그건 영화도 소설도 아닌 정말 드라마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결말에 이를수록 더 좋은 드라마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주변의 세계는 변하고 나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는 그 변화를 성장이라 말할 수 있는 엔딩을 택했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주변을 환대하며 자신에게 있는 사랑을 본다. 담담하고 의연한 해방.
좋은 드라마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