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
담벼락 아래에는 정갈하게 댑싸리가 자라고 있다. 반쯤 열린 낡은 나무 대문 사이로 보이는 마당은 언제나처럼 빗질이 잘 되어 있지만, 높다란 뜨락은 노파에게는 더없이 불편해 보인다. 동란에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마을은 실향민과 강원도에 화전민들이 이주해와 형성된 산골 마을이었다. 혼자인 노파에게 바로 옆집에 같이 남으로 내려온 사촌이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산골 마을이지만 재 너머에 일제 강점기에 금광이 있던 탓에 산골 마을로 30여 가구가 있는 제법 큰 마을이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탓에 호롱불에 나무로 난방이며 음식을 해야 했다. 노파는 남으로 내려오며 가져온 재산이 있어 천수답이며 가파르나마 밭을 소유하고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땅이 없는 소작농으로 노파는 이들에게 식량을 내어주기도 했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말이 어눌한 노파에게 말을 거는 이는 별로 없었다. 십여 명 남짓의 아이들이 노파의 집 옆 공터에서 북적대는 것이 때로 위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말투가 어눌한 데다 육손이인 노파는 아이들조차 멀리하는 듯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탓에 주변에 잡목을 베어다 난방이며 음식을 해야 했던 탓에 주변 산들은 헐벗어 있었다. 장이라도 보러 갈라치면 경운기도 간신히 다니는 길을 오리는 내려가야 큰길에 닿을 수 있었고, 물건이라도 사려면 십여 리는 족히 걸어야 했다. 얼마 전 전기가 들어와 조금 편해지기는 했지만, 몸이 점점 불편해져 가는 노파는 자신을 보살피는 질부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 노파는 질부에게 내일 아침에 꼭 자신의 집에 다녀가라고 신신당부하셨다고 했다. 다음날 집안은 평소보다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목욕까지 하시고 곱게 옷을 갈아있고 이불을 덮은 채 정갈하게 누워있었다고 했다. 동네 어른들은 노파는 동네 아이들이 철쭉을 먹고 중독되었을 때 깨끗한 수건에 물을 묻혀 입 주변을 계속 적셔주라 알려주었으며, 자기 죽음을 미리 아시는 영험하신 분이시라 했다. 노파의 신체적 특징은 그러한 소문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듯했다.
자살하시려면 하나만 드시지 뭔 농약 두 종류에다가 수면제까지 드셔서 일이 많다고 투덜댄다. 한 발 더 나가 자살은 범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후배에게 우리가 중독사 여부를 판단하지 자 타살 여부를 판정하는 건 우리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투덜대는 후배에게 괜히 트집을 잡아보지만, 밀려드는 과중한 업무와 매일 같이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사건들로 정서가 메말라가는 동료들도 나도 안쓰럽다. 나의 이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살이 우리나라 형법상 범죄가 아닌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형법 250조는 사람을 살해한 사람을 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신은 자신에게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살인죄의 객체를 타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실무와 학설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라지만,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해석되는 듯하여 받아들이기 꺼려진다. 자연의 이치를 다루는 자와, 사람 사는 이치를 다루는 법률을 다루는 자의 생각에는 언제나 틈이 존재하리라.
법독성학은 중독사와 관련하여 죽음의 의도성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사망 당시 혈중농도가 행동이나 판단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평가할 뿐이다. 중독사에 있어서 자 타살은 증명이 어렵다. 스스로 먹었다고 한들 자의적 판단인지 아닌지는 결국 자신만 알기 때문이다. 대부분 종교에서 자살은 그릇된 행동으로 이야기하고, 유교에서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해하는 것은 불효라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몇 국가들에서 특정 조건에서의 안락사를 허락하며 인간의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다, 자기 죽음에 대한 선택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이러한 결정이 인간이 해도 되는 일인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데 익숙한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신학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업무상 피할 수 없이 알게 되는 자살의 사연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들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저, 현재의 삶이 자신의 그리던 삶이 아니며, 당장의 고통이나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함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동반자를 찾아 삼삼오오 외떨어진 숙소에 모여 창문을 모두 막고 질소 통을 열어 질식사하는 경우 감시자 한 명을 제외하고 치료농도(수면에 이르는 농도)의 수면제가 검출되기도 한다. 세상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가 생각해 보면, 이들은 현실의 무언가를 피하고 싶은 것이지 죽고 싶은 것 같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그렇듯 죽음에 대한 공포를 혼자가 아니라는 힘을 빌려 피해가 가고자 하는 듯하다. 다양한 사연으로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하필 연휴 시작 저녁에 메탄올 음독 이력이 있고 이로 인해 시력이 손상되어 시력장애 4급이신 분이 다시 메탄올을 음독한 것 같다는 중독환자가 중독분석실에 접수되었다. 해독제 사용 여부를 결정해야 하니 서둘러 분석하도록 조치하였다. 역시나 또 메탄올을 드셨다. 보건복지부에서 국립중앙의료원을 통해 수행하고 있는 해독제 보급사업을 통해 해독제가 공급되었을 것이고 적절한 의학적 조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분께 다시 한번 삶의 기회가 제공되었기를 바라지만,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니, 선택을 막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은 또 다른 숙제이다. 어렸을 적 한날한시에 죽거나, 배우자 사망 후 1년 안에 죽은 부부는 부부 금실이 좋다는 말은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어서 일수 있지만, 혼자만의 삶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선택한 동반자살이거나 먼저 보낸 배우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고독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망자와 자신과 주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자살률 1위, 이 문제를 줄이기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그 노력이 그다지 성과가 좋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업에 맞지 않는 고민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삶을 제공하는 것도, 허락된 만큼의 삶을 영위하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일정 부분 사회와 국가의 책임일 것이다. 파킨슨이 점점 심해진 노파에게 댑싸리로 빗자루를 만드는 일도 그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내는 일도, 높다란 뜨락을 오르내리는 것조차 버거웠을 노파에겐 조카며느리에 기대어 유지하는 삶은 존엄에 관한 문제였을 것이다. 모두일 수는 없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 모두에서 인간다움 존엄이 지킬 수 있는 사회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