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치와 자연의 이치
사흘간 내린 눈은 산골 마을을 모두 흰색으로 덮었다. 꼬마들에게는 비료 포대에 짚이며 갈대를 넣어 눈썰매를 탈 수 있는 놀이터가 만들어지고, 조금 큰 아이들과 어른들에게는 각자의 재주로 사냥에 나설 사냥터가 만들어졌다. 가난한 산골 마을의 절반은 겨울을 날 쌀이 부족했다. 잘 말려두었던 옥수수에 사카린을 넣어 푹 삶아낸 강냉이죽과 방 한쪽을 대충 막아 쌓아 둔 고구마로 겨울을 난다. 내린 눈은 가난한 산골 마을 사람들에게는 단백질을 보충할 좋은 기회다. 큰아이들은 토끼 덫은 놓으러 산에 오르고 어른 몇은 고라니를 잡기 위해 놓은 덫을 확인하러 산에 올랐다.
토끼를 잡는데 서툰 소년은 얼마 남지 않은 청산가리 1) 묻힌 찔레 열매를 관목 수풀 아늑한 곳에 눈을 치우고 꽂아 둔다. 십 여리 더 들어가 있는 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금광이 있었고, 그 덕에 제법 깊은 산골에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다. 금광에 쓰던 청산가리로 새를 잡는 것은 금광이 남긴 흔적이리라. 쌓인 눈으로 먹이 구하기 힘들어진 산비둘기며 꿩이며, 겨울 철새들이 이 열매를 먹고 근처에서 죽으면 눈에 잘 띄니 좋은 기회다. 곧 다가올 설에 꿩이나 토끼 고기로 만두를 만들어야 하니 좋은 때 눈이 반갑기만 했다. 잡아 온 꿩에 식초를 넣고 잘 삶아내면 맛있는 만두 속이 될 것이다 2).
한 마을에 세 노인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때문인지 경찰이 돌아가지 않고 기다린다.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한 마을에 세 분이 한날 돌아가신다는 우연은 흔치 않다며, 부검 소견에서 별다른 것이 없으니, 약독물 결과를 보고 가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처럼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 더욱이 세 분의 관계가 한 할아버지의 부인과 친구부부로 뭔가 의심하는 경찰의 태도는 당연하니 그냥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결과가 오늘 중에 나올 수는 없지만, 가능한 몇 가지를 해서 일차 결과라도 알려주어야 돌아갈 기세이다. 위내용물이 거의 없어 소량의 위내용물과 위조직이 의뢰되었다. 혈액이 약간 선홍색이기는 하지만, 사후 경과시간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정황상 독살이라면 소량의 독성이 큰 물질을 사용했을 것이다. 경험적으로 청산이 가장 유력하지만, 위조직이나 위내용물이 중성에 가깝다. 자살 목적으로 많은 양을 먹은 경우에는 위내용물이 강알칼리성을 띠지만, 죽을 만큼의 소량을 사용하면 위산 때문에 알칼리성이 아닐 수도 있다. 서둘러 청산에 대한 정밀 실험을 해봐야 한다. 경찰은 기다릴 수 있지만, 행여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라면 빨리 원인을 찾아야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 더욱이 이 마을 노인 분들은 세 분이 사망하기 전날 관광버스를 이용해 여행을 다녀왔다니 마음이 급하다. 밥 먹으러 가려는 후배에게 청산 시험을 하고 가자고 붙잡았다. 밥 먹고 올 동안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세 망자 모두 위내용물보다 혈액에서 청산 농도가 높아 보인다. 계산된 양의 투약이 강력히 의심된다.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고 관광버스에서 나눠준 음식물은 드시지 않도록 조치한다. 경찰의 수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며 시도 때도 없이 경찰의 전화가 이어진다. 집으로 복귀하며 들른 식당을 영업정지 시켰고, 식당의 음식물을 어떤 것을 채취하면 되는지 묻는다. 만약 식당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집이 아니라 식당에서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설득이 다행히도 받아들여져 식당은 정상영업을 했고, 식당과 관련된 감정물은 의뢰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부부의 집에서 냄비에 남아 있던 게를 가져왔다. 섬으로 여행을 다녀오며 잡아온 것이라 했다. 퇴근 무렵에 가져온 증거물을 빨리 해달라고 기다린다. 퇴근은 고사하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실험했다. 게에서 청산이 검출되었다. 부패하면 청산이 나올 수 있으며, 게에서 검출된 청산은 아주 작은 양으로 사람이 죽을 양은 못된다. 또 게가 청산 때문에 죽을 정도로 바다에 뿌려졌다면, 많은 죽은 물고기들이 해변으로 밀려왔을 것이라는 말에도 경찰은 섬의 갯벌을 퍼왔다.
뻘에서도 청산이온이 검출되었다. 유기물이 썩으면서도 청산이온이 생기기 때문이다. 증거물을 가져올 때마다 밤늦은 시간까지 결과를 기다리는 경찰의 유난스러움은 계속되었다. 의미 없는 것이라고 달래도 보고 화도 내보지만,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러던 와중에 경찰 수사의 집요함은 성과를 냈다. 세 망자는 노부부와 한 할머니였는데, 용의자로 지목된 할머니의 남편에게 20여 년 전에 청산가리를 팔았다는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과거, 대장간에서 담금질할 때 철을 강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던 청산나트륨은 자전거 수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집과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청산가리는 찾지 못했다. 거짓말 탐지기 등 여러 보강 수사에도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고, 용의자의 일관된 범행 부인에도 기소되었다. 3명의 살인이라는 강력 범죄의 특성상, 용의자의 자백이나, 범행도구인 청산가리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죄 판결 가능성이 50% 일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에 무색하게 용의자는 1심에서 징역 20년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용의자는 항소했고, 대법원은 해당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용의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청산가리를 임의 제출하며, 자신의 것은 20년이 넘어 독성이 없다는 주장을 청산가리는 시간이 지나면 독성이 사라진다는 판례를 근거로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3심은 1심, 2심과 달리, 변호사, 검사, 판사로 이루어진 재판이 아니다. 재판에 법리나 판례, 또는 적용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지만을 다루는 일종의 서류 심사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로부터 용의자가 임의 제출한 청산이 감정 촉탁 3)이 접수되었다. 의뢰된 증거물에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코를 시큰하게 할 정도로 청산 냄새가 코를 찌른다 4).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의 덩어리 수십 개가 담긴 유리병 두 개, 검은 비닐봉지 두 개 네 점이다. 형태로 보았을 때 청산나트륨(NaCN)으로 청산이온과 나트륨 이온 확인해서 청산 나트륨임을 확인한다. 문제는 질문이 20년간 독성이 유지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단순히 청산나트륨이 확인되는 것으로 답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의뢰된 증거물로 독성 실험을 하는 것도, 20년간 독성이 유지되는지 실험하거나 가혹 조건을 통해 입증하는 것도 문제 해결의 핵심은 아니다. 청산이 시간이 지나면 독성이 사라지는 것은 특정 조건에서 과학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으니, 기존 판례는 존중받아야 하며, 그 판례를 들어 파기 환송은 법리상 타당하다. 그러나, 의뢰된 증거물은 분명 청산이온을 가지고 있고, 독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법리와 자연 이치의 충돌이다. 밤새 고민 끝에 자연의 이치로 답하기로 했다. 청산이 시간이 지나면서 독성이 감소하는 것은 조해 5) 하기 때문이다. 조해는 강알칼리인 물질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물이 만나 일어난다. 청산나트륨은 강알칼리로 조해하는 특징이 있다, NaCN이 NaHCO3나 Na2 CO3로 변하고 HCN은 대기 중으로 휘발하여 사라진다. 의뢰된 증거물 중 유리병에 든 청산나트륨은 병 안에 든 수분과 이산화탄소가 소비될 때까지만 조해가 일어나며, 뚜껑이 닫혀 있다면 대부분이 독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 이상 될 수 있다. 비닐봉지에 든 청산나트륨은 노출된 상태로 지속적인 이산화탄소와 수분이 공급되지만, 입자도가 커서 조해산물이 막을 형성하여 조해가 느려지고 덩어리 안쪽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되어, 수십 년간 그 독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요지로 감정서를 썼다. 감정서 검토를 부탁은 후배가 그냥 청산나트륨 양성으로 감정서 내면 안 되느냐며 투덜댄다. 법은 사람 사는 이치를 다룬다. 사람 사는 이치는 문화와 환경이 바뀌면 변화해야 하지만, 너무 빠른 변화는 사회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판례를 중시하는 사법부의 태도는 존중받아야 하며, 판례의 변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 사건은 자연의 이치가 판례를 바꿀 이유가 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법은 사람 사는 이치를 다루고 과학은 자연의 이치를 다룬다. 사람 사는 이치를 다룰 때 과학의 원리와 증명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감정인의 일이다.
감정 촉탁서에는 일반 공문서에 관인과 달리 판사 이름과 개인 도장이 찍혀 있다. 감정서를 발송하는 공문서에는 관인이 찍히지만, 첨부된 감정서에는 감정인 개인의 도장이 찍는다. 내가 아는 한 공적 업무 수행에 개인의 도장을 찍는 직종은 판사와 감정인 둘뿐이다. 판사가 판결에 대한 책임의 무게만큼, 감정인도 자신이 과학적 판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이리라. 용의자는 결국 2심의 형이 확정되었다. 법은 사람 사는 이치를 다루지만, 과학은 자연의 이치를 다룬다. 때때로, 감정인의 판단이 재판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 특히, 중범죄와 관련될 때, 심적 부담이 크지만, 자연의 이치에 근거한 판단, 그것이 감정인의 일이다.
1) 청산가리: 청산칼륨(KCN)의 일본식 발음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상적으로 청산나트륨(NaCN)을 포함하여 청산가리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청산칼륨은 입자가 곱고 순도가 높아 금세공 등에 사용하고 청산나트륨은 입자가 크고 순도가 낮으며 주로 공업용으로 사용한다. 청산나트륨의 최소 치사량은 200 mg 정도로 독성이 큰 편에 속하지만, 이보다 낮은 최소 치사량을 가지는 물질이 많음에도 맹독성 물질로 알려진 것은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금광이 개발되며 이때 사용되면서 자타살 목적으로 많이 사용된 경향으로 보인다.
2) 청산가리는 산성 상태에서 HCN으로 바뀌며 휘발성이 커지게 되어 쉽게 제거된다. 초산을 넣고 끓이면, 청산이 빠르게 제거된다.
3) 감정물을 의뢰하는 것을 경찰이나 검찰은 감정 의뢰를, 판사는 감정 촉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4) 청산 냄새: 아몬드 향이라고 불리지만, 엄밀하게는 다르다. 아몬드가 청산 배당체를 가지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청산배당체가 분해하며 생기는 청산(HCN)의 냄새로 볶은 신선한 아몬드의 향과는 다르다. 청산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맡을 수 있는 사람 사이에도 민감도는 상당히 다르다. 감정인 40여 명 중에 5명 정도가 청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5) 조해(潮解, deliquescence): 주변의 수분을 흡수하여 고체가 녹는 현상을 말한다. 강알칼리성을 가지는 물질은 조해하는 특징이 있다. 강알칼리는 이때 흡습한 물과 이산화탄소로 만들어진 탄산으로 인해 일종의 중화반응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