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연병장이 늘어선 병사들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의 눈빛을 하고 있다. 내 눈빛 또한 그러하리라. 90년대 들어서면서 병영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과 연인과 헤어짐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련만 젊은 나이에 세상과 단절되고 통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주는 압박감이 크기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석사학위 과정 중에 이런저런 집안일로 가까스로 학위 과정을 마쳤다. 몸도 마음도 지쳐, 대부분의 동기가 병역특례에 취업이 확정되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병역특례 업체를 알아보았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다니는 제약회사에서 병역특례를 하기로 하고 면접을 보러 상경하였다. 면접 후 만난 선배는 너의 성향은 제약회사보다는 국과수가 맞을 거라며 한 번 가보라 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소개한 선배를 생각해 가보기로 하고 받은 면접비 만원으로 무작정 택시에 올랐다. 급여는 제약사의 60% 수준이었지만, 마치 입사할 것처럼 환대해 주시는 분들과 막연하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제약회사 대신 연구소를 선택했다.. 얼마간 더 받는다고 내 생활 수준이 나아질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감당해야 하는 대가는 경제적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말 언론을 강타한 병역특례 비리는 졸업 후 1개월 이내 취업해야 한다는 병무청의 일방적인 결정이 관보에 올랐음을 알지 못했던 인사담당자는 다른 입사자들과 같이 5월에 발령 나게 되면서 결국 늦은 나이에 입대하게 되었다. 호기심과 호의는 연병장의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많이 민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90년대 초반 병역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고, 그 당시 그 결정을 거스를 힘은 개인에게 없었다. 지금이야 민감한 사안들은 금세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입대하고 나니, 병무청의 졸업 후 1개월 이내 취업은 실효성이 없다며 철회되었단다. 어느 공무원의 현실을 살피지 않은 대책 보고서 한 장, 국민 중심이 아닌 행정 중심의 의사결정, 꼼꼼하지 못한 검토와 결재는 이렇게 누군가의 선택에 불필요한 대가를 요구한다.
수화기 너머로 군대식 고압적인 말투가 들려온다. 본인은 병무청 특별사법 경찰이며, 키미테를 눈에 발라 병역 면탈을 시도한다는 첩보가 있는데 이걸 해결해 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수사권이 있으니 우리 원의 업무에 해당하지만, 새로운 업무이니 본원에 문의해 보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병무청에 대한 좋지 않은 잊지 못할 추억이 떠오른다,
키미테는 스코폴라민 1.5 mg이고 서방형으로 설계되었을 것이니 손에 묻혀봐야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눈에 발라서 피부로 흡수될 수 있는 양은 극히 제한적이다. 일반적으로 노출을 평가하는 소변이나 혈액에서의 검출은 그 당시로서도 아니지만, 지금 기술로 검출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경구투여 되더라도 워낙 생리활성이 크기 때문에 멀미에 0.32~0.65 mg 사용되며, 외국에서는 스코폴라민을 눈에 뿌려 앞을 안 보이게 한 후 성폭행에 이용되기도 한다. 흡입하게 되면 환각 상태에 빠지고 순응적이 되며 약효가 끝나면 기억을 못 하게 되기도 한다. 외래종으로는 천사의 나팔(브루구만시아, 남미 열대지방 원산)이 관상용으로 재배되며, 우리나라 고유종으로 미치광이풀, 독말풀 등에 아트로핀, 히오스시아민과 함께 스코폴라민이 함유되어 있다. 나물로 오인하여 먹고 중독되는 사례도 수년에 한 번씩 보고된다. 주 중독 증상은 흥분, 섬망 착란, 동공 확장, 호흡부전, 부정맥, 빈맥, 고혈압, 타액분비 감소, 요저류 등이 일어난다. 섭취량에 따라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남미지역에서는 천사의 나팔 향에 독이 있다 하여 어린아이들은 이 꽃 근처를 가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스코폴라민은 생리활성이 강력한 알칼로이드로 극소량이 눈에 묻어도 동공이 확장되고 안구를 통해 흡수되어도 혈액으로 유입되는 양 자체가 극미량이어서 어차피 지금의 분석기술로 소변이나 혈액에서 검출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락부락하게 생긴 서넛의 병무청 특별사법 경찰들이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 외국의 분석기관에도 문의해 보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된다는 곳이 없어서 왔다고 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건 괘씸하지만, 대전까지 온 건 가상하다. 키미테를 이용해서 안구진탕증 진단을 받는 방법이 인터넷에 널리 퍼져있고, 자신들이 가진 첩보만도 50건이 넘는다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간절한 눈망울로 바라본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문서 한 장으로 나를 군대 보낸 병무청도 밉지만, 약물을 이용해 4급으로 판정받아, 공익근무로 배정받은 이들은 더 밉다.
소변과 혈액 같은 생체시료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해봐야 알겠지만, 안구진탕증처럼 동공이 확장되어 있다면, 눈과 눈 주위에 가장 많은 스코폴라민이 남아 있을 것이니 거즈에 식염수를 묻혀 눈 주변을 닦아 보내주세요. 저는 그사이에 감정 기법을 개발하고 있겠노라 하고 돌려보냈다. 감정기법을 확립하고 수십 건 양성 판정하여 보내고, 얼마 후, 본원에 대전에서보다 10배 감도가 좋은 장비가 설치되어 업무를 본원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병무청에서 스코폴라민을 이용한 병역 면탈 시도를 규명해서 재검을 통해, 현역 입대, 처벌 등을 했다는 홍보성 기사가 나왔지만, 어디에도 국과수는 없었다. 이후 한동안 의뢰되다가 더는 의뢰되지 않았다. 시도해 봐야 밝혀졌기 때문이리라.
이 여파로 정신병을 위장해 병역 면탈을 시도하는 사람에 대한 정신과 약물 복용 여부 검사, 혈압을 높이는 약물을 복용해 고혈압으로 병역 면탈을 시도하는 사람에 대한 약물 검사가 추가되어 연간 2,000여 건 이상의 감정 수요가 생겼다. 이 선택은 그러지 않아도 증원은 없이 마약사범이며 부검 증가로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또 다른 짐을 지어주게 되었다. 병무청은 외국으로 의뢰하던 것을 돈 안 들이고 국내에서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으니 좋겠고, 빠른 병역 판정이 이루어지고 불필요한 외화 유출을 막은 것이라 좋은 일이지만, 그러지 않아도 늘어난 감정량으로 힘들어하는 동료 후배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병무청에서 카페인 고함량 음료를 마셔 심전도 이상을 일으켜 병역 면탈을 시도하는 방법이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다며, 카페인 검출 여부를 감정 항목에 추가해 달라는 연락에 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병무청은 수사관이 없으니 설립목적상 해 줄 의무는 없다고까지 말해도 한동안 전화는 계속되었다. 꼭 필요한 경우 병무청 사법경찰을 통해 충분한 정황이 확인된 것은 절차상으로 가능하니 그렇게 하자는 타협안도 무용지물이다. 무슨 권리로 병무청이 민간인이 커피 마시는 것까지 조사할 권리를 가졌는가! 의심되면 일정 시간 후 심전도 다시 측정하면 해결될 일을 타기관에 업무 부담을 주고 실효성이 없을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고 화를 내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렇게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키미테 경우처럼 그런 시도는 사라질 것인데 시간과 돈을 들여 분석할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카페인이 검출된다는 것만으로 병역면탈을 시도했다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 커피를 마셨을 수도 있고 녹차를 마셨을 수도 있고 콜라를 마셨을 수도 있다. 카페인에 노출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예비 범법자로 규정하겠다는 발상이다. 증명력은 없지만 의뢰하여 처리하면 행정적으로 깔끔하니 행정 편의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것만 같아 30여 년 전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었다.
개인적 문제의 선택의 결과는 자신을 향해 있고 제한된 범위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행정의 선택은 불특정 다수가 영문도 모른 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훨씬 신중히 해야 하고, 그 결과는 예측 가능해야 하며, 그 의도가 공익적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권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