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가장 오래된 것들을 정리하며

by 창조적소수

우리 집에는 소리 없이 긴 세월을 버텨온, 묵묵한 두 동행이 있었다. 하나는 온 가족의 빨래를 널어 말려준 빨래건조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간식과 음식을 데워준 전자레인지. 믿기지 않게도, 두 물건 모두 올해로 18년을 채웠다. 2007년에 우리 집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가장 오래된 물건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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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지고 기울어진, 18년짜리 빨래건조대


며칠 전, 드디어 낡은 빨래건조대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별이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한쪽 날개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새로 하나 사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모른 척했고, 균형을 잃은 건조대가 한쪽으로 기울어져도 그냥 지나쳤다. 매번 빨래를 널 때마다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는데, 나는 왜 그토록 외면했을까? 환경을 위해서 오래 쓰려던 마음이었을까? 아니다. 2007년 그때의 나는 환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를 위해 불필요한 것은 사지 않고, 한 번 산 물건은 오래 쓰려 노력하며, 전기와 물을 아끼고 분리배출을 성실히 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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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 빨래건조대는 우리 가족의 굵직한 시간들을 함께한 존재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할 때도, 건조대는 늘 짐칸 한 구석을 차지하며 우리를 따라왔다. 맑은 날엔 뽀송하게 옷을 말려주었고, 비 오고 습한 날엔 무거워진 빨래를 묵묵히 버텨주었다.


어느 날 친척집에 갔을 때, 튼튼해 보이는 빨래건조대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나온 제품이라 그런지 견고하고 실용적이었으며,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가격까지 합리적이었다. 품질도 좋고 가격도 괜찮은 건조대를 바라보며, 이제는 정말 새로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이 너무 다양해서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같이 다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크기나 디자인, 기능도 제각각이라 어느 하나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신발까지 함께 널 수 있는 제품을 찾아보다가, 마침내 마음에 쏙 드는 빨래건조대를 발견했다. 그 순간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가격까지 예상보다 훨씬 저렴했다. 마치 오랜 세월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꼭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처럼 그 건조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망설임 없이 그 건조대를 주문했고 다다음날 나에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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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건조대의 포장을 뜯는 순간, 조립해야 할 구성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오랜만에 조립하는 일이라 살짝 긴장이 되었다. 한 장짜리 설명서를 왼쪽에 펼쳐두고, 하나씩 구성품을 꺼내어 조립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18년 만에 하는 조립이라서 이렇게 서툰 걸까? 여러 가지 물건을 조립해왔던 경험이 있는데, 왜 이건 손에 안 익는지 스스로도 웃음이 났다. 알고 보니 봉을 위 아래 방향을 바꿔 끼운 탓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방향을 제대로 바꿔 끼워주자, 그때부터는 거짓말처럼 술술 조립이 진행되었다.

역시, 감은 살아 있었네~

금세 완성된 새 건조대를 보니 괜히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새 건조대를 조립한 기쁨도 잠시... 문득 오랜 세월 나와 함께했던 빨래건조대를 바라보자, 이유 모를 미안함이 밀려왔다. ‘드디어 너를 쉬게 해주는구나’ 하는 마음과 ‘이제 정말 너를 버려야 하는구나’ 하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고장이 나 더는 쓸 수 없게 되었지만, 막상 버리려니 쉽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장 난 건조대를 베란다 한쪽에 세워두었다. 혹시라도 빨래가 많은 날, 한 번쯤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버리기로 한 결심은 조용히 뒤로 미루어진 채, 조금만 더 머무르기로.


또 하나의 오랜 동반자, 18살 된 전자레인지.

지금은 버려 없어졌지만, 친한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물건이라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내 주방 한켠을 지켜주며 수많은 끼니를 함께한 고마운 존재. 그렇게 긴 세월을 함께하다 보니,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오랜 세월 본래의 색이 바래 누렇게 변하고, 기름때와 찌든 흔적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고 내부는 튀어버린 음식 자국이 굳어 남은채 위생과 미관상의 이유로 결국 이별을 했지만 새 전자레인지를 들였을 때 느낀 미묘한 허전함이란…. 디자인은 세련되고 기능은 더 다양했지만, 왠지 모르게 예전 것만큼 마음이 가지 않는다. 음식을 데우는 속도도, 맛도, 그 편안한 익숙함도 예전 같지 않았다.


요즘 세상은 빠르고, 성능 좋고, 예쁜 새 물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조금만 낡거나 유행이 지나면 쉽게 버리고 새것으로 대체하곤 한다. 하지만 18년 동안 나의 곁을 지킨 이 두 물건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우리 가족의 시간을 담아낸 타임캡슐과 같았다. 18년 전부터 가족의 빨래와 음식을 감당해주었던 삶의 증인으로서의 존재였던 것이다.


고장 난 건조대를 세워두고, 성능 좋은 옛 전자레인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는건 결국 그 물건과 함께했던 소중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감사함이 아닐까 싶다.

새로 들인 건조대와 전자레인지도 훗날에, 오늘처럼 고마움과 아쉬움 속에서 뭉클하게 떠나보낼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때까지, 이 새로운 동행자들도 우리 집의 새로운 시간을 묵묵히 함께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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