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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를 시작하기 시작했던 날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주변에 자해를 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있다 한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게 맞나 싶고 어쨌든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교 때였던 것 같다. 어떤 기분이었더라. 아주 우울했었나? 죽고 싶었나?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은 온통 어지러웠고 뭔가 해소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야 이 지끈거리는 머리가 진정될 것 같았다. 왜 하필 그게 자해였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 이상은 쉬웠다. 충동이 오면 자해했다. 희미한 한 줄에서 깊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더라, 종이 한 장에 손 조금 베이는 것도 그렇게 따가워하면서
내가 유일하게 싫었던 건 병원에 가면 진료를 거부하거나 한심한 듯 보는 의사 선생님들의 얼굴이었다. 참 이상도 하지 그 와중에 부끄럽기는 해서 병원에 가기 싫었다. 소독하러 오라는 말에 그냥 소독약과 붕대를 사서 내가 직접 소독하곤 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병원을 가는 게 아이러니 자체인가?
나는 처음엔 손목을 긋는 행위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영화에 나오는 손목을 긋고 죽는 장면을 보고 그랬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손목을 긋고 욕조에 들어가면 죽어버리니 그렇게 죽음이 쉬운지 알았다. 혹시나 싶어 목에도 한 번 그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깊게 긋지도 못했을뿐더러 지금 보면 목주름 같아 별로다.
그런데 뼈가 보일 정도로 그어야 한다고, 손목을 긋는 걸로 죽기 쉽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계속 자해를 했던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좀 봐달라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해를 하는 사람들이 “관심받으려고 그러지?”라는 말에 상처를 많이 입기에 조심스럽다.
그저 나의 경우 그랬다.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데 날 좀 붙잡아줬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기에 바쁘다. 그 와중에 나도 좀 신경 써달라고 투정 부린 것이다. 그 자해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난 알기나 했을까. 사실 지금의 나도 여전히 모른다.
지금은 조금 더 괜찮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내 손목엔 천만 원이 들어가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흉터 치료에 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손목엔 가까이서 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은 남아있다. 치료가 굉장히 아팠는데 우스갯소리지만 차라리 자해하고 싶을 때 피부과 시술을 받을 걸 그랬다.
아무튼 지금에서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자해는 내 몸부림이며 울부짖음이었다. 나 이렇게 힘들다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때의 나를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싶다.
이 글을 통해 자해를 후회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진 않다. 여전히 자해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나 조차도 아직 가끔씩 찾아오는 충동으로 힘이 든다. 그래서 그 마음이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애쓴다고, 많이 힘들겠다고 멀리서나마 작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