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무대를 사랑하겠다는 다짐
나에겐 ‘공간’을 좀 더 사랑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산책’이다. 산책은 그 어떤 재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시간과 두 발이 필요할 뿐이다. 간단하지만 무제한으로, 그리고 무료로 즐길 수 있기에 가난한 대학생에겐 반가운 방법이다. 산책을 한다는 것은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 공간을 그냥 흘러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가 더 세심한 시선으로 그 공간을 구석구석 간직하겠다는 약속이다. 산책은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일상생활의 무대를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결국 스스로의 삶을 더 아껴주겠다는 약속과도 같다.
걷다 보면 '나의' 공간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어떤 날의 어떤 시간, 그곳을 거닐던 내가 지닌 감정과 상황에 따라 그 공간은 내 기억의 일부가 된다. 감정이 고스란히 새겨진 공간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그렇게 이 빼곡한 도시에도 나의 것이 생긴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걸었던 거리, 눈물을 애써 참으며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친 거리, 친구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던 거리, 늘 가던 곳에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했던 익숙한 거리. 그 거리 위에 가지각색의 내가 툭-하고 쌓인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찾게 된 그 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의 기억을 뿜어낸다. 내 발걸음마다 묻어 나오던 슬픔과 기쁨이 타인의 발걸음에도 옅어지지 않고 선명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거리는 나의 거리가 된다.
유독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동의 이유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어떤 곳에서 떠나기 위해 이동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이동한다. 나는 소위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인 ‘이동’에서 삶의 활력을 얻는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경쾌함을 좋아한다. 자신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장소를 바꾸는 것’에 쓰는 사람들에게 공간의 의미는 더욱 특별해진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공간을 맞이하기 위해 기꺼이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남김없이 탈탈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새로운 기쁨을 누리는 것이 힘들어진 마당에 고작 공간이 바뀐다는 것에 행복해질 수 있다니,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여유와 낭만이 사그라진 후에도 내가 그런 사람으로 남길 바란다.
서울살이 3년 차, 낯설고 두근거리게 하던 것들의 색채가 희미해지고, 비슷한 자극들이 반복되니 마음도 쉽게 무디어지려 한다. 그럴 때마다 아주 작은 노력으로도 신선한 자극을 안겨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책’ 일 것이다.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외로움이 있다. 나는 그 외로움에 마음이 아플 때면 덩그러니 놓여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물들을 보기 위해 걷는다.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꽃 한 송이에서, 색이 바랜 표지판에서, 불빛이 희미해진 가로등에서. 그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하루와 숨결을 상상하며, 그 어느 것도 내게 묻지 않는 사물들에게 위로를 얻곤 한다. 그 찰나의 묵직한 위로를 위해 나는 산책을 한다. 도통 나를 모르는 이 도시에서, 나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오늘도 묵묵히 나의 발자국을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