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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타르트 Nov 25. 2024

딸 키워봐야 소용없네



               

그의 첫 번째 수술과 치료가 끝나고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던 무렵이었다. 아빠가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려던 그 순간,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가 어젯밤부터 배가 너무 아팠대. 오늘 아침 병원에 같이 왔는데 큰 병원으로 가보라네, 시간이 나면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엄마의 평온한 목소리 뒤에 숨겨진 긴장감이 느껴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어젯밤 회를 먹고 체한 줄 알았는데… CT 찍어보니까 대장암 이래. 큰 병원에 가서 더 자세히 알아보라는데 예약 좀 해줄래?”

‘대장암.’ 그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손끝이 차가워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알겠어, 금방 알아보고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류를 집던 손은 얼어붙은 것 같고, 평소에 익숙하게만 느껴지던 사무실의 소음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내 안에서 서서히 공포가 피어오르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빠도 대장암 4기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간으로 이미 전이된 상태였다.


아빠는 키가 크고 체격도 좋았다. 내가 어릴 적 아빠의 넓은 어깨에 올라타던 기억이 뚜렷했다. 그러나 수술 후 하루아침에 쇠약해진 아빠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좌절했다. 이전에는 그렇게 강해 보이던 아빠가 이제는 힘겨워 보였고, 나는 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힘든 일은 한 번에 온다더니 지금의 내가 그러했다. 하지만 수술 후 빠르게 회복하더니 항암 치료를 받는 중에도 이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렇게 아빠에게서 병이 사라져 갈 때쯤 재형이 떠났다. 언제 뒤틀려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마음 상태의 나를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때 아빠는 묵묵히 내 뒤에서 보미를 돌봐주며 내 곁을 지켜주었다. 엄마, 아빠, 보미, 그리고 나. 우리는 그렇게 작은 가족으로서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여행을 다녔다. 경주, 거제, 통영, 진주, 제주… 어디든 떠날 수 있는 곳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그 여정 속에서 아빠의 정기 검진도 계속되었고, 그러던 중 재발 소식을 들었다. 또다시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아빠는 다시 퇴원을 하지 못하는 날을 만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는 제한되었고 간병은 엄마 혼자 감당해야 했다. 나에게 병원은 쓸쓸했고 차가운 곳이었다.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못된 딸이었는지 남편을 떠나보낼 때와는 다른 마음이었다.

 

아빠가 떠나신 후 우리는 가족끼리 조용히 모였다. 엄마가 장례식에 대해 말했다.

“아빠랑 장례식 얘기했는데 그냥 가족장으로 하기로 했어. 많은 사람 불러서 이런저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우리끼리 조용히 보내드리자.”

엄마는 목소리를 떨며 마지막으로 아빠와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말을 보탰다.

“사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괜히 사람들이 재형에 대해서 물어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엄마가 덧붙였다. "아빠랑도 이야기했는데 니 이름 옆에 재형이 이름이 없어서 니가 속상할까 봐.. 근데 아빠는 그 정도는 재형이도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재형이 이름 넣어주라고 하는데 엄마는 그건 아닌 것 같고 사위와 며느리에게 미안하지만 너희 셋 이름만 넣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다 같이 침묵으로 동의했다.


나의 부모님은 당신의 죽음과 배우자의 죽음 앞에서도 나의 상처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하셨다. 그렇게 나를 보호하고자 했다. 혹시나 내 이름 옆에 남편의 이름이 빠진 것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그로 인해 내가 다시 상처받을까 걱정하셨다. 남편의 죽음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던 내 마음을 아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나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장례식 날, 우리는 상주 명단에 배우자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오직 자식들의 이름만을 올려놓았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내 남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그들의 시선과 말들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고 그저 가까운 가족들만이 함께 했다. 그 이후 장례식에 다녀간 작은 형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느꼈던 묘한 감정은 나를 깊은 혼란에 빠뜨렸다.

“정말 고생 많았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아버지 가시는 길이 조금 쓸쓸하지 않았을까 싶더라. 원래 장례식은 북적북적해야 하는 건데…”

형님의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가 외롭게 떠난 건 아닐까, 가족장으로 진행된 장례식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마르지 않는 내 눈물은 또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내 상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빠마저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미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빠가 떠난 자리마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끝까지 나만의 아픔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떠나신 후 나는 다시 재형을 떠올렸다. 재형이 떠났을 때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를 잃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슬픔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런데 아빠의 죽음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눈물이 나왔지만 그때만큼 절절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지쳐서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슬픔에 익숙해져서였을까?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들도 애써 곱씹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회피였다.

재형의 죽음 앞에서는 세상이 멈춘 것 같았지만 아빠의 죽음은 그저 지나가버린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슬픔에 익숙해져 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재형을 잃었을 때처럼 아빠를 애도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슬픔마저 점점 무뎌져 버린 내가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마음속에서 울컥하며 말이 튀어나왔다.


'딸 키워봐야 소용없네'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도 나는 그 말을 내가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 나 자신을 외면했던 수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부모님의 헌신 앞에서 나는 철저히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 시선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건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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