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처음 거짓말을 한 날이 떠오른다. 세 살부터 보미에게는 아빠가 곁에 없었다.
그런 보미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아빠 언제 돌아와?” 하고 묻던 그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아이의 순수한 눈빛을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 나의 시선은 마치 죄를 짓는 사람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아빠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있어. 그래서 오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아.”
그 말을 내뱉고 나서 가슴 깊이 안도했지만,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이게 과연 아이를 위한 선택이 맞는 걸까?' 그저 대답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묵묵히 그 거짓말을 감췄다.
시간은 흘러 보미는 네 살, 다섯 살이 되자 아빠를 덜 찾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친구들에게 아빠가 먼 곳에 있다고 소개하는 보미를 보고 나는 한편으로 안도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스며들며 아빠를 향한 아이의 그리움도 희미해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여섯 살, 일곱 살이 된 보미는 조금씩 아빠의 부재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나를 보고 싶지도 않은가 봐. 나 돈 없어도 괜찮은데... 나를 아빠가 싫어하는 걸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이가 말하는 동안 나는 숨을 멈춘 채로 아이의 작은 손을 쥐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아빠는 정말로 보미를 보고 싶어 할 거야. 그저, 아빠가 연락할 수 없는 곳에 있을 뿐이야.”
아이를 위한 위로라며 내뱉은 그 말은 사실 나 스스로도 믿고 싶었던 거짓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또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나로 인해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 속에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의 사진을 보며 미소 지으려 애쓰는 보미의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아이에게 진실을 말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걸.
그날 밤, 아이가 깊이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묵직하게 쌓인 마음의 갈등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나는 왜 진실을 숨겨왔을까? 정말로 보미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내가 감당해야 할 슬픔을 피하고 싶었던 걸까. 나를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으며 숨이 막혔다. 며칠 밤을 그렇게 뒤척이다 드디어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내기로 했다.
어느 저녁, 보미와 함께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아빠는 혹시 하늘나라에 가신 거야?”
아이가 어떻게 이 질문을 하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이제 아이와 마주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숨을 고르고,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보미의 눈동자에 어리둥절함과 슬픔이 얽혀 있었지만, 그 속엔 알고 싶어 하는 애타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보미야, 엄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이의 손을 잡고 마주 앉아 천천히 말했다.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럽게, 그리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진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빠는 많이 아팠어. 아빠가 열심히 치료도 받고 수술도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어. 그래서 아빠는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어. 아빠는 보미를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이젠 항상 하늘에서 보미를 지켜보고 계실 거야.”
보미는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어리둥절함과 서운함, 그리고 슬픔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엄마, 근데 왜 우리 아빠만 그렇게 된 거야? 다른 친구들 아빠는 다 있는데... 우리 아빠 늙지도 않았잖아”
그 말에 나는 목이 메었다. 떨리는 손으로 보미의 볼을 만져주었다.
“그런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보미가 감기에 걸리는 것도 보미의 잘못이 아니듯이, 아빠가 아픈 것도 그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이야.”
나는 깊은숨을 쉬며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죽는다는 건 무서운 일 같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떠나는 시간이 오는 거니까. 다만 그 시간이 사람마다 다른 것뿐이야. 어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하늘로 가기도 하고, 어떤 어른은 아주 나이가 들고서야 하늘나라로 가지. 저마다 주어진 시간이 있고 아빠는 그 시간에 도달한 거였어.”
“거북이는 100살이나 살잖아, 근데 왜 아빠는...”
“거북이가 100살을 산다고 해도 모든 거북이가 100살을 정확하게 살지는 못해. 오래오래 사는 게 좋겠지만 우리 모두 결국엔 떠나야 하는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야”
아이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제야 아이가 조금씩 나를 안아오며 말했다.
“엄마도, 나도 다 죽어?”
“그럼,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다 죽을 거야. 그러니깐 죽는다는 건 무섭거나 두려운 일은 아니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모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다는 건 결정된 일이야”
죽음이란 걸 알 수 없는 아이는 죽음에 대해 더 묻기 시작했고 난 아이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강조했다.
“그럼... 아빠는 이제 안 아프겠네?”
“응, 이제 아빠는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보미랑 엄마를 지켜주고 계실 거야. 그리고 언제나 하늘에서 보미가 잘 자라고 있는지 보고 계실 거야.”
나는 아이의 작고 따뜻한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아이는 나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도... 아빠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빠가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엄마도 아빠가 같이 있으면 너무 좋겠어. 그래도 보미랑 엄마가 씩씩하게 웃으면서 잘 지내면 아빠도 너무 좋아할 것 같아. 슬퍼만 하고 있으면 아빠가 더 속상하겠지?”
보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흘려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듯 아빠가 멀리서 자기를 지켜볼 것이라는 나의 말을 되뇌는 듯했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온전히 마주한 채, 그간 감춰왔던 아픔을 녹여내듯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서로를 껴안고 오랫동안.
나의 남편이자 보미의 아빠인 그의 이야기를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제 보미가 아빠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보미는 그날 이후로 더는 아빠를 기다리며 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아빠를 생각하며 한결 씩씩하게 또 더 많이 웃음 짓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남편이 남긴 사랑의 연장선 위에 서 있었다.
이제 그 비밀은 혼자가 아닌 우리만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