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믿었던 어른이 사기꾼이었다

남아공 생존일기

by 제드 Jed

남아공에 온 지 반년쯤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오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정산을 하러 오셨단다.


‘정산’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아버지와 단둘이 같은 방에서 잠을 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을 뒤척이며 한숨만 푹푹 쉬셨다.


"아빠, 무슨 일 있어요?"
"괜찮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 말이 전부였다.


그날 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병원은 가서 어떤 진료를 받았니?”
“교복은 당시 얼마였니?”
“가디언 아저씨가 기숙사엔 얼마나 자주 갔어?”


처음엔 무심코 대답했지만,
점점 묘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잠시 후,

아버지는 말없이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셨다.


그건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민낯이었다.

가디언이 아버지께 보낸 '정산서'.
내게 들어간 비용을 정리한 명세서였다.


그런데 그 종이엔

내가 알지 못하는 항목들이 가득했다.

청구서 항목 중에는 한식 제공도 있었다.
분명 가끔 불러 밥을 해주셨지만, 그게 유료였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밥을 안 주셨다고 했으면

덜 속상했을 것이다.

진심이라 믿었던 한 그릇의 밥이

돈으로 계산됐다는 게,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였다.


나는 아버지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아빠, 이건… 사실이 아니에요.”
“제가 교복 값은 정확히 기억하는데 이 비용

아니에요.”

"병원 진료받을 때, 그분의 가족들도 같이 받았는데 그 비용이 전부 청구된 거 같아요."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내게 혹시라도 해가 될까 봐

결국 그 청구서 금액 전부를 지불하시기로 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지만, 가디언에 대한

나의 분노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내 개인 통장을 개설했다.
이젠 가디언을 거치지 않고
학비, 기숙사비, 식비, 용돈 모두

직접 관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남아공에서 ‘진짜 혼자’ 서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나는 그 가디언과의 인연을 끝냈다.

하지만 그의 악행은 계속 내 귀에 들렸다.


한참이 지난 후, 믿기 힘든 소식을 들렸다.

그 가디언이 한국인 박사님께
비즈니스 명목으로 사기를 쳤다가 적발되었고,
결국 남아공에서 영구 추방당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한동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그가 준 따뜻한 밥보다

그 따뜻함을 믿었던 내가 더 부끄러웠다.


나는 누군가를 의심할 줄 몰랐고,

세상이 그토록 계산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행동은 더 큰 울림으로 남았다.

말없이 다 내주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내 편이 되어 준 사람.


진짜 어른은

‘계산을 넘어서서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나는 그 사건 이후로

훨씬 더 강해졌다.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웠고,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부모님의 신뢰와 사랑 안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사건은 내게 상처였지만, 어쩌면 성장통이었다.

진짜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내가 딛고 넘어야 했던, 작고 아픈 돌멩이 하나.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나는
한 가지 더 깊이 깨달았다.


진짜 어른이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보고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나는 그날 이후 더 조심스러워졌지만,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 마음까지 잃진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아버지처럼,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진짜 어른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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