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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Apr 15. 2022

22. 4. 15.

소방일기

<빨간 차를 타는 사람들>

소방차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빨간색이 생각난다는 말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노란색, 주황색 등 다른 색을 칠한 소방차가 제작되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친숙한 소방차의 색깔은 빨간색이다. 빨간색은 인간이 눈에 담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되는 색으로, 소방차를 빨갛게 칠한 까닭은 이러한 이유와 결이 다르지 않다. 빨갛게 칠한 소방차는 출동 중 구조 대상자의 눈에, 길을 터주는 운전자의 눈에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색보다 먼저 닿는다. 구조가 필요한 사람은 멀리서 오는 소방차를 보며 안심하고, 꽉 막힌 도로 위 운전자는 저 멀리서 출동 중인 소방차를 보고 기꺼이 길을 만들어준다. 이렇듯 소방차를 빨갛게 칠한 이유는 위험한 현장에 좀 더 일찍 도착해서 현장이 더 이상 위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빨간 소방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생각, 나이, 고향은 모두 다르겠지만 출동하는 소방차 안에서 하는 생각은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장에서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았으면, 현장에 누구라도 위독한 사람이 없었으면, 현장이 부디 무탈하게, 안전하게 마무리됐으면. 그게 우리들이 센터에서 근무하는 이유이고, 소방관으로서의 사명이다.


    내가 교육받은 중앙소방학교 3층 복도에는 이런 글이 써져 있었다.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조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소방관의 기도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의무소방대원이었던 내 동기였던 동생은 이 시를 가사로 해서 만든 소방 노래도 있다고 했다. 늘 걷던 복도에 떡하니 붙어있던 글귀여서 매일 물 마시러 가는 길에, 훈련을 받으러 가는 길에, 운동하러 내려가는 길에 수시로 봤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글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소방관이 되어 센터로 배정받은 뒤 근무를 하던 나는 한 번씩 그 시가 떠올랐다. 우리 팀장님은 몇 달 전 화재현장에 들어가서 구하지 못하고 까맣게 타 버린 한 구의 시신을 보고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후회하듯 혼잣말을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컴퓨터를 응시하고 묵묵히 일했지만 가끔 팀장님은 센터 사무실을 서성이며 홀로 중얼거렸다. “좀 더 일찍 들어가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후회하듯 내뱉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팀장님은 그 순간을 끔찍이도 그리워하기까지 하는 듯했다.


  중앙소방학교 교육생 때의 일이다. 나는 입교 한 뒤로 줄곧 조용히 지냈다. 그게 내 다짐이기도 했고, 내가 가장 편안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긴 인생을 산 건 아니었지만 내가 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잘 사는 방법이라 믿었던 건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조용하게 혼자 잘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저런 일 겪으며 가장 어려운 것이 ‘남들처럼 사는 것’이라는 걸 가슴 깊이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득 찼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내가 뭐라고 누구를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던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소방학교 입교 전 내 다짐은 ‘나부터 잘하자’였다. 그리고 그 다짐대로 교육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내 생각을 바꾸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소방학교 첫 주에 방화복, 공기용기 등 개인 장비를 지급받고 난 뒤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 시간 전엔 언제나 PT체조나 구보를 했다. PT체조는 요령껏 하면 됐지만 구보는 요령껏 할 수가 없었다. 구보를 할 땐 잘 못 뛰는 동기는 유독 눈에 띄었다. 그렇게 뒤처지면 그 동기는 교관님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낙인찍힌 동기는 이리저리 뒹굴기도 하고 그 인원 때문에 전체가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너희 동기 안 데려갈 거야? 이것도 못하면서 소방관은 어떻게 할래? 이래 가지고 현장에서 누구 구할 수 있겠어?” 하며 얼차려가 시작됐고, 우리는 언덕을 오를 때까지 오리걸음으로 쪼그려 가야 했다. 나는 다 같이 얼차려를 받으며 힘들기도 했지만 내심 ‘표적이 된 저 사람은 얼마나 미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기 표정을 보니 죽을 둥 살 둥 뛴 듯했다. ‘안’ 뛰는 게 아니었다. 다리를 움직이려 해도 도저히 움직이지 않고 허파에 공기가 끝까지 차올라 ‘못’ 뛰는 게 눈에 역력히 보였다. 생생하게 그 모습을 보며 그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계속 그 동기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다음날 우리 조에선 조금 잘 뛰는 사람들을 뽑아 달리기가 조금 부족한 동기들 옆에 붙어서 같이 도와주면서 달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내가 놀랐던 점은 나도 모르게 그 의견에 선뜻 응했다는 것이었고, 더 놀랐던 점은 내가 도와주겠다고 옆에서 뛰기를 자처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떤 마음으로 덜컥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때 손을 안 들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도 모르게 같이 뛰어야겠다는 다짐이 덜컥 들었다. 뜻이 맞는 몇 명의 동기들과 함께 우리 조는 우리만의 대형을 만들었다. 우리 조만의 ‘구보 대형’이 그려졌고 우리들만의 전략으로 태조산 언덕을 느리지만 열심히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잠들기 전 착한 사람이 소방관이 되는지, 소방관이 되어 착해지는지에 대한 주제로 일기를 썼다.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여전히 의문이지만 어쩌면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떤 이유로 소방관이 됐든, 소방관이 되었으면 소방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게 뭔지 설명하라고 물으면 나는 조금 부끄럽지만 사명이라는 두 글자를 쓴다. 선임들과 비교해서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햇병아리 신임 소방관인 내가 이런 단어를 쓰는 게 나조차 어색하지만 적어도 내가 짧은 소방생활 동안 만난 대부분의 사람은 사명을 완전히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피를 보기 싫어서, 다른 생명의 아픈 모습을 보는 게 내키지 않아서, 조용하고 편하게 오늘 근무를 마무리하고 싶어서, 이유는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습관처럼 세상의 안녕을 원한다. 그 마음은 소방관이라면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한 초등학교에서 불이 났다. 화재가 발생을 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떨렸다. 현장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펌프차 내부는 세상에서 가장 소설 쓰기 좋은 장소가 된다. 어떤 상황을 상상하든 그 일이 정말 다 벌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는 식당 배식 칸을 따라, 개수대를 따라, 음식을 준비하는 조리실 내부로 길고 뿌연 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선이 끝나는 지점엔 무쇠솥 사이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선임 반장님이 들고 온 k급 소화기를 꺼내 토하듯 불을 뱉어내는 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솥은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고 불을 내뿜는 소설 속 괴물처럼 보였다. 그 괴물은 세찬 비를 흠뻑 맞고 이내 희뿌연 연기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안심하는 그 순간 솥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내 머리 위로 쿵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뜨거운 복사열로 녹아버린 천장 타일 하나와 형광등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헬맷을 쓰고 있어 괜찮았지만 난 순간 그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가스폭발이 아닐까 하고 짐짓 놀랐다. 식당에 진입했을 때 가스배관이 열린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나온 뒤 그제야 호흡을 크게 쉬었다. 선착대인 우리 펌프차 뒤로 어느덧 여러 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질서 없이 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엔 꼬마 신사숙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리 센터는 완진 확인 후 지휘차량에게 현장을 인계하고 짐을 챙겨 복귀했다. 복귀하는 차에서 헬맷을 벗으니 표면엔 소화 약제인지, 재인지 모를 하얀 분말이 뿌옇게 묻어있었다. 센터에 도착하여 장비를 내려놓고 밖을 보니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쨍쨍하고 화창했다. 불과 십 분 전의 상황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세상이 합심하고 아무 일 없었다고 시치미 떼는 듯했다.


  현장활동을 하며 세상이 무책임하게 생명의 끈을 절단한 그 음울한 단면을 보며 이 세상에 벌어지지 못할 일은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현장에 도착해서 우연처럼 벌어진 슬프고 끔찍한 순간들을 끄고, 지우고, 다시 과거로 되돌린다. 불과 며칠 전 사고나 화재로 불길한 기운이 감돌던 곳은 그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그 현장을 바로 그 시간에 목격한 소수의 사람들만 “저번에 여기서 이런 사고가 있었대” 하고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그곳에서 현장활동을 했던 소방관의 기억 속엔 사진처럼 생생하게 남아있다. 돌아오는 길에 센터장님은 어느 한 모텔 건물을 보며 “예전에 저기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하며 주임님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내 눈엔 어떤 사고 현장이 아닌, 그저 한적한 호숫가 옆 모텔 건물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삶을 피폐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현장의 기억들이 소화하기 힘들고, 내 삶을 좀먹는 기억이 될 거라 걱정하진 않는다. 그렇다기엔 그 순간을 얘기하던 센터장님의 모습이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어렸을 때 낚시터에 가서 고등어를 낚았다는, 평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그런 일상을 그리듯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센터장님은 그때 분명히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추억 얘기하듯 말이다. 오늘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화재도 내게 그런 기억이 될 것이다. 어느새 머릿속에 생겨난 ‘사명’이라는 상자에 오늘 기억을 고이 접어 담는다. 상자가 닫히고 내 머릿속 불도 탁 하고 꺼진다. 요란했지만 조용하고, 불길했지만 고요하고, 슬플 것 같지만 편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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