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하늘 Nov 04. 2022

22. 11. 3.

<1>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쓰는 글. 이틀 전 바디프로필 촬영을 마쳤다.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내 혀는 그동안 음식을 최대한 순수한 본연의 맛으로 즐기게 되어 아주 연약하고 부드러워졌다. 평소에 즐겨먹던 짜고, 달고, 매운 음식들을 거의 세 배는 더 깊고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촬영을 마친 날 저녁에 카페를 갔다가 꽤 무자비해보이는 칼로리 폭탄 베이글을 먹게 되었는데 입안에 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입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축제가 열린듯했다. 생닭을 물에 넣고 끓여낸 하얀 닭가슴살을 오물거리다 밀가루 가득 넣고 반죽해서 만든 베이글에 크림, 계피가루, 설탕을 뿌려 달달하게 만든 베이글을 베어 무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맛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2>

당직을 마치고 운동을 다녀왔다. 확실히 잘 먹으니 걸음을 걸을 때도, 일을 할 때도, 그냥 생활 전반에서 정신이 훨씬 더 또렷하고 기분마저 좋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 운동도 훨씬 잘 될 줄 알았는데 스쿼트하다가 깔릴 뻔 했다. 생각보다 회복은 더딘 듯하다. 운동을 마친 뒤 냉동실에 있는 닭가슴살과 오트밀, 단호박을 전자렌지에 돌려 먹었다. 토마토와 단호박을 후식으로 먹었다. 현규형님께 받은 치토스도 그릇에 조금 담아 먹었다. 바디프로필은 끝났지만 아직 내 몸은 바디프로필 끝난 걸 모른 채 여전히 굶고 못 먹던 그 시절에 있을테니 당분간은 클린하게 먹으려 한다.


<3>

언젠가부터 글이든, 운동이든, 공부든 뭐든 진지하게 하는 게 상당히 꺼려졌다. 뭐든 진지해질 것 같으면 그 전에 속도를 낮췄다. 스무살 무렵에는 도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활활 불타오르고 언제든 질주할 준비가 된 경주마 같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다. 꽤 신중하게 두들겨보고 진짜 해야할 일인지 나중에 해도 될 일인지 구분하고,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들겨본 후에 스테이지로 뛰어 든다. 나도 왜 이렇게 바뀐 걸까 수십번 묻고 생각해보니 나한테 에너지가 이정도 차 있음을 알고, 또 그 에너지가 쉽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 듯하다. 박근호 작가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내 몸엔 에너지를 담고 있는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에 에너지를 퍼다 쓰는 게 스무살 때는 수시로 가능했다면 지금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한 번 우물이 바닥을 보이면 다시 가득 차는 데 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무언가 덜컥 해버리면 그다음에 다시 뭔가를 도전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4>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족한다.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한 번 쯤은 권하고 싶다. 두 번은 말고. 세 달 전 이맘때 나는 일도 적응이 잘 안 되고 생활하는 게 힘들었다. 특히 같이 일하는 센터장님이 너무 어려웠다. 우리 센터에서 가장 높은 직급의 선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첫 단추를 잘 못 꿰었다. 잘 하다가도 그 사람만 보면 실수를 했고, 그렇게 실수를 하니 나는 모자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또 불행한 것이 같이 일처리를 해도 잘못된 것이 높은 확률로 내 근무때 걸렸다. 군대에서 보면 항상 똑같이 잘못을 저질러도 유독 혼자 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딱 그때 내 모습이었다. 혼나니 주눅들고, 주눅드니 못했다. 악순환의 반복에서 난 폭식을 선택했다. 점심에 라면에 계란 두 개를 풀어 먹었다가 저녁에 치킨을 흡입했다. 늘 근무가 끝나면 마트에 들려 '오리온 과자세트'를 사서 꺽꺽 거리며 기어코 네 봉지를 앉은 자리에서 비웠다. 그리고 누워 잤다. 하고 싶은 의지도, 힘도 없었다. 그러다 근무 전날 밤이 되면 불안에 떨며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잠을 잤고, 뒤척이다 일어나면 또 지독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때 난 근무복으로 갈아입으러 가는 그 계단이 미치도록 가파르고 힘겨웠다.


<5>

어느날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다. 둥실둥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배가 보였다. 혐오스러운 몸뚱아리였다. 소방관이라고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망가진 몸이었다. 세상은 날 가엾이 여기지 않는다. 다만 과정과 결과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어떤 이유에서 폭식을 했든, 나는 엄청나게 먹었고 배불뚝이 아저씨가 됐을 뿐이다. 거울을 보는 게 너무 싫고 한심하고 우울했다. 하필 그맘때쯤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을 집 안에 박혀있었다. 사육당한 돼지처럼 살이 뒤룩뒤룩 쪘다. 양옆으로 잡아당긴듯 혐오스러운 몸매였다. 우물이 가득 찬 것도 그때 쯤이었다. 헌데 그때 우물은 좀 탁했다. 활기찬 에너지보다 자기 연민과 혐오로 가득찬 우울한 물빛이었다.


<6>

그때부터 3개월간 운동을 하고, 이틀 전 촬영을 했다. 언젠가 운동을 하다 한혜진이 했던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이랬다. 세상에 모든 게 다 내뜻대로 되는 게 없다. 인간관계, 사업, 공부 뭐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때가 있고, 반대로 내가 적당히 했는데 오히려 잘 될 때가 있다. 늘 사칙연산처럼 되진 않는다. 그런데 몸은 정직하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적게 먹으면 살이 빠진다. 인생에 이렇게 쉬운 게 어딨냐는 말이었다. 물론 마냥 '쉽다'는 사실엔 동감할 순 없지만 운동을 해서 몸을 가꾸는 행위가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공부를 해서 결과를 만드는 것보다 최소한 더 정직하다는 사실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운동을 하고 난 뒤로 자신감이 붙었다. 미움받을 용기가 생겼다. 센터장님이 평소처럼 뭐라고 꾸중을 해도 예전처럼 나를 책망하거나 우울감에 빠지지 않는다. 그냥 더 잘해야지, 가끔씩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척하며 속으론 궁시렁 거리며 '당신 일처리 하는 게 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거냐' 반항을 하기도 한다.


<7>

올해 우물은 이걸로 끝이다. 내년에 새로운 에너지가 차오를 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마지막이라는 직감이 든다. 후회는 없다. 고개를 내밀어 바닥이 드러난 우물을 바라봐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다시 돌아가도 기꺼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내년에 다시 차오를 물을 어디에 소비할지 기분좋은 고민을 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22. 5. 1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