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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Nov 09. 2022

22. 11. 9.

요즘 출동이 잦다. 바쁘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가령 일반적으로 회사업무가 바쁘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일이 쌓여있고, 어느정도 회사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담긴 반면, 소방관에게 바쁘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의미가 아니다.

구름처럼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난다. 헬스장 샤워실엔 꽤 짙은 안개가 거울 표면을 슬쩍 훔치고 몸을 닦는 내 몸을 한 번 훑었다가 창문 사이로 흘러나간다. 평소보다 긴 샤워였다. 한참 쏟아내리는 온수를 비처럼 맞았다. 센터에서도 출동을 다녀온 뒤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샤워실이 있지만 아무래도 센터에서 샤워를 하면 마음이 급하다. 평소보다 더 급하게 샤워를 해서 씻은 듯 만 듯 마무리 짓게 된다. 머리를 말리며 어제 있던 출동을 떠올렸다.

새벽이었다. 고요한 새벽을 요란한 출동벨이 깨운다. 새벽공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란하고 지독한 불협화음이었다. 출동지령서를 확인하니 자동차 화재였다. 위치는 센터근처 5분거리였다. 현장과 가깝다는 말은 시시각각 변하는 화재현장에 좀 더 적극적이고 빠른 대처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속하게 방화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탑승하자마자 분주하게 방화복을 몸에 끼워넣었다. 며칠전 금속폐기물처리장 화재 때 묻은 철가루가 지워지지 않고 남긴 검은 흔적이 얼룩덜룩 방화복 사이에 멍처럼 물들어있었다.

화재 출동에는 크게 두 가지 상황이 있는데, 첫번째는 불이 나지 않은 출동이고 두번째는 불이 난 실화재 출동이다. 우리는 무조건 화재를 가정하고 출동하지만 실화재 출동은 처음 출동지령서를 받을 때부터 분위기가 쎄하다. 무책임한 표현이긴 하지만 정말로 '불이 난 듯한' 분위기가 있다.  그때 차량 내부엔 평소보다 더 불안하고 오싹한 분위기가 숨어있다. 꼭 지금처럼. 펌프차 안은 방화복을 갈아입는 나와 팀장님, 선임반장님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펌프차 밖은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사이렌 소리로 요란스러웠다. 펌프차는 점점 출동지령서에 찍힌 목적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막 면체착용을 마치고 공기용기를 개방했다. 이제 내 왼쪽 옆구리에 있는 공기공급밸브만 꽂으면 외부공기는 차단되고 30분간 사용할 수 있는 '공기 타임워치'가 작동될 것이다. 면체를 착용하자 시야가 잔뜩 좁아졌다. 그런와중에 나는 덜컹거리는 펌프차 안에서 두리번 거리며 화점을 찾았다.

저멀리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펌프차는 점점 그 창백한 빨간점에 가까워졌다. 창백한 빨간점, 그 점은 어미를 잃은 짐승마냥 활활 타올랐다. 이미 꽤 화재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자동차 시트는 이미 불타 녹아버렸고, 남은 전선마저 퍼벅 거리는 소리를 내며 튀어올랐다. 뒤로 돌아가 펌프차 뒷문을 열고 호스를 뺐다. 주임님이 메인밸브와 PTO를 개방하고 방수구를 열자 두꺼운 호스 사이로 물이 콸콸 쏟아져나왔다. 시뻘건 불을 향해 방수를 하자 불길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듯 짙은 연기를 뱉었다. 처음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본네트 내부 엔진룸부터 측면부, 후면부를 차례대로 주수했다. 불길이 점점 잡히는 듯 하다가 갑자기 바닥 전체로 불길이 화르륵 옮겨 붙었다. 불길은 수분을 잔뜩 머금은 호스까지 옮겨갔다. 고온을 이기지 못하고 터진 연료탱크에서 나온 휘발유 때문이었다. 내부에서 새어나온 휘발유를 따라 불길이 번졌다.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라 휘발유 등 유류화재가 발생했을 땐 단순히 물로 주수하는 것이 아닌 비누화 현상으로 표면을 차단해서 더이상 연소를 막을 수 있는 거품 방수가 효과적이다. 때마침 풍호 펌프, 풍호 물탱크 등 후착분대가 도착했다. 우리는 거품을 이용하는 폼방수를 실시했다. 금세 차량은 거품으로 뒤덮였고, 힘을 잃은 불길은 서서히 존재를 감췄다. 도로에 가득 쌓인 거품을 청소한 뒤 센터로 돌아왔다. 나중에 전해들으니 신변을 비관한 한 여성이 번개탄을 차 내부에서 피웠다고 한다. 연기를 뿜어내던 번개탄은 급기야 차 내부로 불길을 옮겨 타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화재가 일어난 경위가 눈에 보였으나 그 여성의 한맺힌 사정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끝으로 전해들은 사실은 그 여성은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주임님과 나는 소식을 전해들으며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안타까운 심정으로 묵묵히 감정을 삼킬 뿐이었다.

내가 소방관으로 일하며 만난 자살 출동의 대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올해 초 진해 한 아파트 17층에서 발생한 화재 또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여성의 분신에서 시작된 불길이었다. 그 안타까운 구조대상자가 발견된 곳은 다름 아닌 베란다였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스스로 죽음까지 택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연기가 그나마 제일 덜한 베란다까지 기어 간 것이다.  스스로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편안함 보단 고통과 회한으로 점철되어있었다. 자살을 선택한 마지막 모습을 보면 제발 나를 말려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내가 감히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저울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닐진대, 죽음을 목격한 소방관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주제넘게 부탁하고 싶은  살아달라는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말로의 대부분에 결국 삶에 대한 의지가 묻어있는 걸 보면  난 이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달라. 부디 살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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