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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May 03. 2023

23. 5. 2.

오월의 첫날

오월의 첫날이다. 당직근무를 마친 뒤 수영을 갔다가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으니 시계는 어느새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간 썼다 지운글, 썼지만 차마 공개하지 못한 글을 합치면 여덟 편이 넘는다. 좋은 습관은 좋은 만큼 금세 사라지기 일쑤고, 나쁜 습관은 중독성이 강해 일상에 붙으면 거머리처럼 도무지 떨어지질 않는다. 한 번 글을 쓰는 좋은 습관을 잃으니 다시 되찾기 영 쉽지 않다. 사는 게 늘 이런 식이다. 내가 가진 좋은 습관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 필연적으로 멀어져 가는 좋은 습관을 최대한 오래 붙잡는 것. 죽을 때까지 진정한 친구 하나 있으면 좋은 인생이다 얘기하는 어르신들 말씀처럼, 좋은 습관 하나라도 손에 쥐고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간밤에 두 건의 출동이 있었다. 첫 번째 출동은 새벽 한 두시쯤 속보기가 울린다는 출동이었다. 소방시설 오작동 확인은 꽤 자주 출동하는 내용 중 하나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 실화재와 연결되지 않아 출동 중 마음이 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순 없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버지와 어린아이가 나와있다. 아이는 새벽녘인데도 말똥말똥한 눈을 한 채로 빨갛게 빛나는 소방차를 가리키며 "빠빠, 빠빵"하며 새초롬한 입을 오물거린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품에 안은채 오작동한 소방시설까지 안내시켜 줬다. 우리가 한 번 보겠다고 한 뒤 귀가시키자 잘 부탁드린다며, 늦은 밤 죄송하다고 말씀했다. 이런 인사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분에 넘치게 감사하다. 뭐든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나와 선임반장님은 발신기 근처를 지켰고, 주임님이 홀로 경비실에 가서 수신기 내역을 확인했다. 새벽에 네 건이나 속보기가 울렸던 정황을 발견했다. 아이가 그 시간까지 말똥말똥한 이유였을 것이다. 안전관리자에게 연락해 적합한 조치를 요청을 하고 복귀했다.


복귀하고 얼마 뒤 해가 뜰 무렵 출동벨이 다시 한번 울렸다. 두 번째 출동, 덤프트럭 단독사고다. 화재출동의 명확한 증거가 도착지에 다다를수록 가까워지는 검은 연기라면 교통사고의 명확한 증거는 교통체증이다. 도착지에 가까워질수록 도로가 꽉 막힌다. 차가 막히기 시작하면 아직 보이지 않는 몇 킬로 앞의 도로엔 분명 사고가 있음을 직감한다. 사이렌을 울리고 차량사이로 도로를 황급히 빠져나가니 저 앞에 종이처럼 찌그러진 커다란 덤프트럭이 우두커니 서있다. 차량 하부의 판스프링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국수가락처럼 늘어져있고 구조대상자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과 블랙박스가 낙엽처럼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출동이든 구조대상자가 우선이다. 커다란 덤프트럭 운전석 위를 올려다보니 운전자가 있었다. 그런데 사고당시 부딪힌 충격으로 운전석 쪽 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선임반장님께서 전기식 스프레더를 사용해 문개방을 시도했으나 워낙 화물차 높이가 높은 탓에 스프레더를 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프레더 무게가 10kg는 족히 넘기 때문에 머리보다 훨씬 높은 운전석 위로 손을 뻗어 작업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스프레더로는 찌그러진 운전석 측 문을 개방하긴 힘들다고 판단하여 선임반장님은 잠시 비켰고 나와 주임님이 벌어진 틈새를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수차례 문을 열었다 닫았다 젖힌 끝에 마침내 문 사이로 구조대상자가 탈출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주임님과 내가 문을 젖힐 때마다 조금씩 차량에 전해지는 충격에도 구조대상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고 충격이 상당한 듯했고 그냥 보기에도 얼굴 주위에 다수의 외상을 확인했다. 거동이 불가능해 자립탈출은 어려웠다. 우리는 운전석 측, 조수석 측 두 갈래로 인원을 나눠 구조대상자를 탈출시키기로 했다. 주임님과 나는 조수석 측, 나머지 인원은 운전석 측에서 구조대상자를 맡았다. 넥칼라를 목에 채우는 주임님의 모습뒤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우리가 고깃집에서, 회식자리에서 늘 맡던 익숙한 냄새, 진한 알코올냄새였다. 피비린내를 제치고 술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상황이 어떻게 됐든 우선 구조대상자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고, 대원 여섯 명이 붙어 마침내 구조대상자를 운전석에서 탈출시켰다. 들것으로 이동 후 구급대에게 인계한 후 교통정리를 했다. 출근시간 꽉 막힌 도로에서 경광봉을 들고 1차선으로 차량을 유도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방금 전 콧속에 들어온 술냄새 때문에 거북한 기운이 돌았다. 교통정리를 하며 다시 멀리서 바라본 사건현장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다시 보니 사고차량이 도로 진행방향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서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을 다시 보니 중앙분리대가 심하게 찌그러져있었고, 사고차량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반대차선까지 튕겨져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운으로 당시 지나던 차량은 없었고, 화물차 한 차량만 찌그러지는 단독사고로 마무리된 것이다.


병원이송을 마치고 돌아온 구급대원에게 물어보니 구조대상자의 활력징후가 좋지 않았다는 후문을 들었다. 인간으로서 연민의 마음이 들다가도, 비릿한 피냄새마저 뚫고 들어온 알코올 향을 생각하니 일말의 안타까움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매번 매스컴에서 다루던 음주사고를 이렇게 밀접한 공간에서 바라보긴 처음이었다. 술을 잘 마신다는 게 경우에 따라선 자랑이 될 만큼 음주에 친숙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다. 며칠 전 대낮에 두 시간 정도 음주단속을 했더니 무려 28명이 단속에 적발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무서우리만치 음주에 관대한 사회의 문제일까 성숙하지 못한 개인의 문제일까,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안타까운 생명들이 피지 못한 채 꺾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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