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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May 05. 2023

23. 5. 5.

능동과 피동,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가 한 선택에 따라 능동의 형태로 살아가지만 나의 노력 여부나 의도와 반하여 불가피하게 피동의 자리에 서야만 할 때가 있다. 그건 바로 가족관계. 삼촌이 되어버렸다, 내가. 이전에 가족관계에서 가졌던 동생, 아들의 호칭 말고 하나의 이름표가 더 생기게 된 것이다. 올해 1월 1일, 새해가 되자마자 토끼대장 전하윤이 태어났다. 계묘년 첫날에 만난 반짝거리는 선물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핏덩이를 보니 분명 생명체이면서도 생명체가 아닌 것 같다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록색 수술가운처럼 생긴 천에 포옥 싸여있는 조그만 핏덩이를 보자니 정신이 빨려 들어갈 듯 신비하여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진 속 울고 있는 하윤이의 눈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생전 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영화 인사이드아웃, 2015


영화 '인사이드아웃'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세계관 안에서 주인공의 경험에 따라 동그란 구 모양의 기억이 만들어져 저장된다. 예를 들어 처음 축구공을 잡았던 때, 처음 웅덩이에 장화를 신고 첨벙거렸을 때, 처음 강아지풀을 잡고 뺨을 간질 었을 때, 처음 민들레 홀씨를 파란 하늘을 향해 후- 불었을 때. 이 기억들은 좋고 나쁨으로 구분되어 좋은 기억은 색깔을 가진 채로, 나쁜 기억은 탁한 검은색을 띤 채로 생각창고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그중에서도 그 사람에게 가장 빛나는 기억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구의 형태로 머릿속에 도착한다. 곧 그 반짝거리는 구는 소중한 추억이 되어 저 멀리 뿌리를 뻗어 커다란 섬을 만들고, 주인공의 삶이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무래도 올해 1월 1일을 그 기적 같던 순간을 기점으로 내 머릿속에도 반짝거리는 구가 생긴 모양이다. 이름은 하윤섬, 푸른 잔디로 가득 찬 이 섬엔 익살맞은 놀이기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수십 발자국 전부터 귀를 간질인다. 난 섬이 생긴 직후부터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한다. 길에서 어린아이를 보면 유독 친근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고, 근무 중 소방차를 보며 손짓하는 아이를 바라보면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싱긋 웃어주기도 한다. 며칠 전 근무 중엔 출산을 했다고 빨리 와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의 뒷모습을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기도 했다.


이렇게 섬이 하나 생긴다는 건, 어떻게 보면 꽤 성가신 감정 스위치가 한 개 더 만들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현재 내가 몇 개의 섬을 가졌을 진 모르지만, 또 앞으로 몇 개의 섬이 무너지고 다시 생길 진 모르지만, 최소한 섬이 생긴다는 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뼘 더 생긴다는 근사한 일이다. 이전에 어린아이가 울면 마냥 싫었다. 저 부모는 왜 저렇게 아이를 그냥 두나 하는 불만이 생겼지만 가끔 하윤이가 울 때를 떠올려보면 그치는 울음이 있고, 도저히 그쳐지지 않는 울음이 있다. 섬이 존재하지 않았을 땐 몰랐던 사실이었다. 만약 이전과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불편한 감정이 들지 않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난 차라리 자리를 피하거나, 자리를 피할 수 없다면 이어폰 소리를 최대한 높이지 않을까.


매번 차라리 하루살이로 태어나 짧고 굵게 태어나고 삶을 마감하는 게 어떨까 습관처럼 얘기하지만 이젠 이렇게 무언가를 가깝게 겪고 깊게 느낀다는 것도 근사한 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같은 동물로 태어났음에도 뇌의 무게가 조금 더 무겁다는 이유로 먹고사는 생존 이외에 많은 부분을 향유하고 음미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성가시다고만 생각했지, 우리가 가진 특권이라고 여겼던 적은 없다. 몇 개의 섬, 그중 올해 하윤섬이 불쑥 생기며 찾아온 변화가 낯설지만 반가운 이유다. 그리고 하윤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남몰래 아파하는 누나를 보며 부모는 누구더러 하라고 정해진 게 없구나, 모두 아이가 태어나며 미성숙한 개인에서 조금 더 성숙한 부모가 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한편으론 이전에 내가 썼던 질문-선한 사람이 소방관이 되는 건지, 소방관이 되어 선한 행동을 하는 건지-에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소방관이 되어 선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 그 사람이 서있는 자리가 그 사람의 행동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덧 부모가 된 누나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섬은 바다이자, 하늘이자, 땅이다. 섬은 삶의 여러단면에서 내게 꽤 깊게 관여한다. 그리고 이런 섬에서 뿌리가 뻗어져 나온 생각은 생각보다 튼튼하고 견고하다. 그러니 앞으로 만들어질 섬이 부디 사랑스러운 모습이길,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라도 섬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말랑한 가슴을 지녔길. 너무 시니컬한 모습으로 삶을 바라보며 섬이 만들어질 기회를 놓치지 않길. 잊을 때쯤 선물처럼 소중한 섬이 하나씩 지어지길. 그리고 나 또한 꽤 멋진 모습의 섬주인으로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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