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하늘 May 20. 2023

23. 5. 18.

사람이 하는 일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바쁜 날은 이상하게 바쁘다. 온 정신이 없다. 마침 선임반장 한 분이 외국으로 출장을 가서, 그 업무를 대신하게 됐다. 거기에 내가 원래 맡고 있던 업무도 있으니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소방서에서 가장 난감할 때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하필 출동이 걸릴 때다. 출동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그전까지 내가 뭘 했는지, 어디까지 마치고 갔는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다시 업무를 이어가게 된다. 연속성이 불투명하다.


어제는 유독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전 10시에 출장을 내고 그전까지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하필 펌프차에 기름이 절반 정도였다. 유류보급 차 주유소에 가게 되었다. 보통 왕복 10분 안에 끝나는데 하필 그때 길을 잘못 들어 20분이 소요됐다. 그렇게 두 배 넘는 시간을 투자하고 오늘 운수가 나쁘구나 생각하며 업무를 이어나가는데 이번엔 출동벨이 울렸다. 차량화재였다. 장소는 센터에서 10분 거리 풍호에서 용원 방면 진해대로였다. 풍호분대와 거의 비슷하게 도착하니 25톤 트럭 앞 보닛 쪽부터 불길이 시작되어 트럭 전면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갓길에 주차된 차에서 나온 불길은 도로옆 초목까지 번져 잡초들 마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팀장님이 호스를 들고 나갔고 나는 도로에 아무렇게 펼쳐진 호스를 일자로 정리하며 팀장님 뒤에 딱 붙었다. 곧 시원한 물줄기가 나왔고, 흰 연기를 마구 뿜으며 화재는 씩씩거리듯 사그라들고 곧 앙상한 뼈마디가 드러난 트럭만 남게 되었다. 센터에 도착하니 호스도 엉망이고, 방화복도 검정이 여기저기 묻어 얼룩이 생겼다. 방화복을 벗으니 땀에 절어 활동복이 등판에 짝 달라붙어 있었다.  벌써 여름같은 봄이구나. 연신 손부채를 얼굴을 향해 파닥거리며 호스를 말리고, 다시 새 호스를 채우고 소방차 세 대까지 세차하니 오전이 훌쩍 가있었다.


오전에 겨우 공문 하나를 접수하고 남은 공문 한 개를 접수하려는데 출동벨이 울렸다. 이번엔 벌집제거출동이었다. 날이 따뜻해지니 벌들도 업무를 개시했다. 신고된 집 주변에 가서 확인해 보니 2층집 꼭대기에 벌들이 위잉-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택 틈 사이에 집을 지은 것이다. 보통 나무 위에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주택 같은 인위적인 건축물에 짓더라도 외벽에 노출된 채로 집을 짓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주택 내부에 집을 짓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제는 육안으로 확인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 자세히 확인해 보니 집에서부터 연결된 환풍구 세 부분에 각각 통로를 만들어 둔 채 왕래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벌들의 날개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들렸고, 가장 우려되는 건 주인 부부의 아이였다. 조카 하윤이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한 방이라도 쏘이면 이런 영아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팀장님은 내부에서 벌이 들어올 만한 구멍마다 벌레퇴치스프레이를 뿌렸고, 나는 외부에서 벌들을 향해 스프레이를 쐈다. 말벌이라면 죄책감이 없었겠지만 벌이 하필 꿀벌이라 제거하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요즘 안 그래도 귀한 꿀벌을 이렇게 잡다니. 독한 약성분에 휘휘 나부끼다 땅으로 처박히는 조그만 꿀벌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아이가 우선이니, 사람이 우선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벌들을 정리한 뒤 주인 부부에게 지금은 없어도 나중에 일을 나갔다 온 벌들이 다시 집을 찾아올 수도 있다고, 며칠간은 각별히 주의하시고 혹시 또 세력이 커지면 언제든지 연락해 달라고 당부한 뒤 센터로 복귀했다.


안타깝지만 아직 일이 남아있었다. 출동을 다녀오니 컴퓨터 화면엔 출동을 가기 이전 그대로의 상태로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센터 근처 문학관에 있는 비상소화장치함 점검과 훈련을 하고 결과 공문을 올려야 했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얼른 문학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관계자께서 흔쾌히 협조해 주셔서 훈련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소방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며 가며 겪는 조그만 환대가 매번 감사하고 큰 힘이 된다. 일정을 마치고 센터로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었고, 저녁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공문을 마무리했다. 휴. 오늘 하루 보고 할 것을 모두 마쳤다. 그동안 나갔던 출동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뒤 근무일지 내용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 후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오전이 되어 장비를 교대할 시간이 되었다. 내 장비를 캐비닛이 넣는 중에 또 한 번 출동이 걸렸다. 이번엔 심정지였다. 심정지, 말 그대로 심장의 정지. 구급대원은 왕왕 겪는 일이었지만 화재진압대원인 나는 겪을 일이 희박했다. 그러다 오늘 우리 구급대의 지원요청으로 화재진압대원인 나도 출동을 나가게 됐다.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게 되면 혈액을 몸 구석구석에 전달 못하게 되고, 혈액에 함께 저장된 산소가 제때 필요한 곳에 닿지 못하게 되면서 신체기능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뇌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정지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심장압박을 실시하는 이유다. 인위적으로 우리가 심장을 압박하며 펌프질을 대신해줘서 혈액을 '일단' 공급시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cpr은 살릴 확률보다 살리지 못할 확률이 많다. 그것도 아주 희박하다. 확률적으로 심정지가 발생한 열 명 중 아홉은 생을 마감하고 고작 한 명만이 생을 다시 되찾는다.


이전에 심정지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대처해 봤다. 그중 가장 무서웠던 건 내가 지레 겁을 먹는 것. 패닉이 와서 허둥지둥해 버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오늘 겪어보니 오히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곳에 든든한 구급대원이 있었던 것이 마음을 굳게 잡는데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창백한 환자의 몸이, 반쯤 풀린 동공이 두렵다는 생각 보다 내가 지금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더 컸다. 인간적인 감정은 나중 문제였다. 돌아오는 펌프차 안에서 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되뇌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불을 끄든, 심정지 환자를 살리든, 이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난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니 배우고 익히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레 겁 먹지 말 것,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23. 5.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