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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Aug 11. 2023

23. 8. 7.

8월 1주차 생각들

<1>
생각해 보니 어느새 일기를 쓸 때 '23'이란 단어를 앞에 붙이는 것도 익숙해졌다. 시간은 늘 그렇듯 앞서가고, 나는 바쁘게 쫓아간다. 이 행태는 죽기 전까지 바뀌지 않을 것만 같다.

오늘 여섯 시부터 지금 글을 쓰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자그마치 여섯 시간 동안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수영도 안 갔다. 이런 날이 있다. 잔뜩 놓아버리고 흥청망청 쉬고 싶은 날. 요즘 난 이럴 때 쉰다. 그것도 듬뿍 쉰다.

이렇게 바뀌게 된 건 언젠가 망가져본 뒤부터다. 그리고 딱히 오늘 하루 더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만 난 전부터 매일 열심히 해왔고, 오늘 쉬면 또 달릴 자신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푹 쉬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게 낫고, 이게 맞다. 옳은 길이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겐 모르겠지만 난 그랬다. 붙잡고 있어 봐야 안 되는 날은 때려죽여도 안 된다. 그냥 하루 버렸다 셈 치고 잔뜩 쉬어버리는 것. 다만 어쭙잖게 쉬면 안 된다. 푹 쉬는 것. 난 그러고 나면 저절로 힘이 생기더라.

오늘 수영도 쉬고 공부도 쉬었다. 요즘 오전에 수영, 오후에 인명구조사 훈련, 저녁에 공부를 한다. 이렇게 단 2주 정도만 살고 있는데 몸에 무리가 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하루를 꽉꽉 채우니 약속을 잡기도 어렵고 하루 중 갑작스레 생기는 일들에 대처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면 어디가 아플 때 푹 쉬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마음속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요즘 저울질을 많이 해본다. 수영, 훈련, 공부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져갈 순 있을까 나한테 많이 묻는다. 욕심 같아선 세 개 모두 하고 싶지만 매번 집에 올 때면 젖은 미역처럼 축 늘어진 내 모습을 보면 하루에 너무 많은 요소들을 욱여넣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며칠 내로 정리해야 할 고민이다.


<2>
한 달 전, 커피를 들고 구조대에 찾아갔다. 인명구조사를 연습해서 따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같이 연습하길 허락받고 훈련한 지 2주째. 첫 주에는 아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어버버 하다가 한 소리 듣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실망도 많이 했다. 장비가 익숙하지 않아 몰랐다는 한 줌의 변명도 있긴 한데 굳이 하지 않았다. 사실 놓고 보면 결국 내 연습량이 적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오늘 로프 타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등반 / 하강을 훈련했다. 하루 연습하면 물을 거의 2리터 가까이 마신다. 700미리짜리 보냉병에 물을 가득 담아 세 통 정도 비우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햇빛이 얼마나 센지 피부에 닿을 때마다 따갑다. 요즘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더 무서운 건 불과 4개월 뒤엔 영하의 날씨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연교차가 40도~50도 육박할 정도니 이건 세계적으로도 꽤 높낮이가 큰 기후 아닐까? 우리나라는 과거에 뚜렷한 4계절이었다가 현재 뚜렷한 2 계절로 가고 있고, 앞으론 더더욱 뚜렷한 2 계절로 갈 것이다. 요즘 내가 가장 무섭게 생각하는 말은 올해 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이다.


<3>
저번 근무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이례적으로 8건의 출동을 나갔다. 조용한 동네 진해, 거기서 더 조용한 우리 웅동센터에선 극히 드문 일이다. 날씨가 더워지며 벌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문제는 말벌도 덩달아 바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엔 말벌집 제거 출동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에 출동이 걸렸다. 계곡이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즐비해있었고 우리는 계곡에 발을 빠트리고 있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작업하게 됐다. 어떤 현장을 막론하고 보는 눈이 있다는 건 꽤 속 시끄럽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했기에 벌이 나오는 곳을 찾아 벌레 스프레이와 토치를 준비했다. 여차하면 불구덩이를 만들 셈이었다. 계곡을 즐기는 사람들이 쏘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보초병 역할을 하던 한 녀석이 나오더니 글쎄 내 손가락에 침을 넣고 홀라당 날아가버렸다. 쏘인 네 번째 손가락엔 얼얼함이 퍼지더니 찡 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땅벌이 꽤 사납다고 하더니 역시 공격적이구나.

그리고 이전 글에 쓴 교통사고 출동을 나갔다가 복귀한 뒤 새벽엔 화재출동을 나갔다. 실제 화재는 늘 그렇듯 출동지령을 받을 때부터 느낌이 다르다. 상황실에서 출동내용을 전파해 줄 때 "자동화재 속보설비 출동입니다"라고 하면 실제 화재가 아닐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다. 이렇게 소방시설이 오작동 일 때도 화재출동으로 전파를 해주는데, 이런 출동은 그냥 출동지령이 내려올 때부터 실제 화재가 아니겠다는 직감이 든다. 물론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화재가 났을 땐 상황실에서 상황을 전파해 줄 때 검은 연기가 보인다든지, 빨간 불꽃이 난다든지 하는 말을 해주는데 어쩐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섬뜩함이 서려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새벽의 화재출동이 그랬다. "웅동 펌프, ㅇㅇ금속 화재출동입니다. 신고자 말에 따르면 현재 불꽃이 보이고 검은 연기가 보인다는 상태. 용원, 지휘, 구조대 출동해 주시고 창원 분대도 지원요청하겠습니다." 연기, 불꽃은 명백한 화재 증거라서 펌프차에 타자마자 바쁘게 방화복을 입었다. 우리 센터와 불과 50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현장도착까진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방화복에 몸을 구겨 넣고 면체를 착용하고 공기용기를 개방하니 딱 공장에 도착했다. 연기가 까만 새벽하늘을 더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용한 달빛과 가로등 불빛마저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었다. 호스를 얼른 꺼내 방수요청을 했고 몇 초가 지나자 호스 사이로 물이 밀려 들어왔다. 느슨하던 호스가 빳빳하게 물로 가득 찼을 때 피스톨 관창을 뒤로 당겼다. 입구가 열리자 세찬 물방울이 튀어나와 줄기가 되었다. 열심히 물을 밀어 넣었지만 공장 화재의 화기가 얼마나 센지 화세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때 선임반장님께서 호스 하나를 더 들고 와 내 옆으로 왔다. 하나 있던 물줄기가 두 개가 됐다. "하늘아 내가 옆으로 가서 쏠게" "예 형님 저는 여기 계속 주수 하겠습니다"

불길은 어느덧 잦아들었다. 후착한 용원펌프와 지휘, 구조대는 잔불꽃 꺼트리는 것을 도왔다. 숨을 좀 돌리자 순간순간의 사진 같은 아까의 일들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금속공장이라 그런지 불꽃색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가 중학교 과학시간에 불꽃색을 실습했을 때 나오던 형형색색의 그 색깔. 벌겋고, 노랗고, 파랗던 그 색깔이 아까 저 공장 집진시설 화재 속에서 공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분명 그 불은 평소 보던 불꽃들과 달랐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공장 취급 금속 중엔 마그네슘이 있다고 했다. 마그네슘은 금수성 물질이라 물이 닿으면 안 된다. 모래로 덮어서 소화시켜야 한다. 단순히 불꽃이 일어난다고 해서 무작정 물을 틀면 안 된다는 얘기다. 불길이 조금 사그라들고 생수 한 병을 들이키며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같은 팀 형님께서 불꽃색 별 금속 종류를 핸드폰으로 찾아보고 있었다. 새벽녘 검은 화면 주위로 형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그때 문득 '공부는 계속해야 하는구나, 끝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위로 형님과 내 몸은 이미 땀에 절어 바지고 티셔츠고 온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무엇이 이 힘든 와중에도 굳이 폰을 켜서 찾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좋아하는 일이라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누가 시켰으면 저 색깔을 지금 찾고 있었을까? 적어도 난 절대 찾아보지 않았을 것 같다. 뭐든 빠르고 바쁘게 변하는 세상이다. 하물며 소방관이 불꽃도 공부해야 하는 세상인데 누군들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직업이든 필연적으로 배워야 하는 굴레 속에 있다면, 그때 내가 흥미로워하고 좋아할 만한 일을 한다면 기꺼이 좀 더 부지런해지지 않을까. 나는 무슨 영문인지 그날 형형색색으로 반짝거리는 불꽃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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