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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새 May 19. 2024

개와 사람과 벽난로

240519

낡은 철제 문고리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세월을 머금은 버건디색 대문 앞엔 새초롬한 잔디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잔디는 새벽녘 선물 받은 이슬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햇살은 기어코 이슬을 훔쳐 하늘로 훌훌 달아났다. 난 부지런한 세상의 알람 소리를 들으며 기지개를 켰다. 후줄근한 작업복에서 피어오른 먼지는 잔디밭을 지나 숲 속으로 사라졌다. 사방이 숲으로 덮인 평화로운 이 농촌은 아일랜드 중부에 위치한 롱포드다. 이 글은 이곳에서 지낸 몇 달간의 소박한 일상을 담은 글이다.
 
난 이곳에서 잡일을 했다. 당시 날 고용한 맥도웰 아주머니는 풍채가 있는 금발의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인자했고, 친절했으며, 성격이 급하고, 코골이가 심했다. 하루는 소파에서 주무시다 본인의 “크르렁!”하는 콧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기도 했다. 그녀는 내년까지 이곳에 호스텔을 만들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인 토니와 스페인에서 온 일꾼 악셀은 목공일을 했다. 내가 언젠가 과자를 먹고 봉지를 접어 버리던 모습을 본 그녀는 내가 정말 깔끔하다며 호스텔 청소를 맡겼다. 난 그렇게 얼떨결에 청소부가 되었다.
 
일은 굉장히 편했다. 개업하지 않은 호스텔이라 내부는 그다지 청소할 게 없었다. 다만 호스텔이 자연과 가까운 건물이다 보니 생활 얼룩이나 풀, 이끼 같은 자연으로부터 생긴 부산물들이 많았다. 난 악셀과 토니가 거쳐 간 목공소를 치우거나 몇 달간 방치되어 까맣게 이끼가 쌓인 차고 앞 도로를 청소했다. 신기한 건 일할 때 누구 하나 간섭이 없었다. 열심히 쓸고 닦을 때도, 잠깐 벽에 기대앉아 휴식을 할 때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 내가 해리포터 투명망토를 걸친 게 아닐까? 의아했지만 며칠 동안 일하며 그냥 이곳 문화가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일과를 마친 뒤엔 종종 내가 저녁을 차리곤 했다. 예전에 한국에서 가져왔던 오뚜기 카레를 해줬더니 식구들이 맛있게 먹길래 ‘구운 달걀 카레’ 레시피를 보곤 저녁으로 그걸 만들기로 했다. 냄비에서 보글거리는 카레 냄새가 거실로 퍼지자 맥도웰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왔다. 아주머니는 흡족한 표정으로 엄지를 세웠다. 나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따봉’을 담아 맥도웰의 마음 우체국에 보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저게 뭐야?”라고 물었다. “삶은 달걀을 굽고 있어요. 이러면 식감이 재밌어지고 소스가 잘 배어들 거예요.”라고 대답했더니 아주머니는 당황하며 집게를 들고 팬에 있던 달걀을 빈 접시로 옮겼다. 그렇게 구운 달걀 카레는 백지화되고, 결국 그날 저녁상엔 당근, 브로콜리, 감자, 돼지고기가 들어간 밋밋한 오리지널 카레가 오르게 됐다. 삶으면 삶고, 구우면 구웠지, 이미 한 번 삶은 달걀을 굳이 다시 굽는다는 걸 이해하기 힘든 듯했다. 외국은 무조건 변화에 친근할 것이란 건 우리의 편견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은 뒤엔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당시 롱포드엔 겨울이 오고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날씨가 쌀쌀해졌다. 거실 한편에 있는 벽난로에 마른 장작과 불쏘시개 나무를 쌓아 올렸다. 빨간 적린에 성냥 머리를 그어 조그만 불을 만든 뒤 장작 위에 툭 던졌다. 조그만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리던 불이 얼마 뒤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올랐다. 불 꺼진 거실엔 모닥불의 은은한 불빛이 카펫에, 벽면에, 티브이에 내려앉았다. 아주머니의 크르릉거리는 콧소리를 턴테이블 음반 삼아 들었다. 몸을 축 늘어뜨리고 누워있으면 어디선가 터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집의 반려견 버디였다. 추위를 피해 들어온 녀석은 벽난로 앞에 누워 공벌레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곤 새근새근 잠들었다. 나는 사람만 한 녀석의 배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생각의 바다로 잠수했다. 그러다 불현듯 이 여정의 시작점이 된 하얀 봉투를 떠올렸다. 몇 달 전 내가 받았던 편지에 들어있던 아일랜드 비자, 그 비자는 사실 대사관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아닐까. 무용하지만 흥미로운 상상을 하며 더 깊게 눈을 감았다. 따듯한 온기가 고요히 퍼졌다. 개와 사람과 벽난로와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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