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출동을 나가 주검을 마주했다. 차가운 계단에 쓰러져있던 비통한 고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아파트 계단은 사람들로 가득 차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보호자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흐느꼈다. 우리는 제세동기로 심장을 압박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았다. 들것에 환자를 옮기며 보호자에게 정황을 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고 했다. 운동 삼아 계단을 걷는 도중 심장이 멈췄고, 얼마 뒤 그곳을 지나던 이웃이 미동 없이 쓰러져있는 그를 발견하고 신고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희망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름 모를 구조대상자는 그날 하늘의 별이 됐다. 그날 집을 나설 때 그는 알았을까. 그녀는 알았을까. 세상은 알았을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하늘의 별이 된다.
난 현장에서 숙제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평소에 끝, 마무리, 죽음, 이런 속성의 것들에 대한 상념에 빠지곤 한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어둡고 피폐하게 묘사한다. 반면 생은 푸르고 활기차게 그린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죽음은 음울하고 슬픈 것만은 아니다. 죽음이 있어 생이 빛난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 코끝에 전해지는 꽃향기, 고개를 들면 보이는 별, 우리 주위에 산재하는 것들은 삶이 유한하기에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순간, 이 감각, 이 시간을 언제든 제약 없이 바라보고 가질 수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가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언제든 있을 테니까.
끝이나 마지막을 바라보고 현재로 돌아오면 내 앞에 어렴풋한 이정표가 만들어져 있다. 영원할 것 같다고 믿던 때엔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진지한 숙고, 그 회고를 통해 날 재조명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삶이 당장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다면, 나도 그처럼 불의의 사고로 심장이 멈추게 된다고 상상하다 보면 이정표엔 ‘다른 이의 삶을 살지 말자’란 문장이 입력된다. 삶의 진실이 뭔지, 삶과 죽음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숨이 멈추면 어디로 가는진 모르겠으나 한 번 태어났으면 적어도 내가 꿈꾸던 삶을 산 뒤 눈을 감자고 다짐한다. 죽음을 목도하면 이 문장은 더 강렬히 빛나고 향이 짙어진다. 난 생을 마감하기 전, 세계를 유랑하고 싶다. 아들로서, 소방관으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그 임무가 끝난 뒤엔 세계 곳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 뒤에 내가 화단에서 쓰러지든, 공원에서 쓰러지든, 어디서 생을 마감하든 난 여한이 없다. 반대로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면 난 불행히도 영영 눈을 편히 감지 못할 것 같다.
죽음은 슬프고 음울한 단어로 많이 비치지만 한편으론 모든 건 유한하다는 의미를 알려준 고마운 단어이기도 하다. 삶은 받지 않는 부재중 전화가 아니다. 죽음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내가 가진 것이 곧 사라질 수도, 심지어 내일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 잘 가다가도 우뚝 멈춰있는 시계처럼 삶은 언제 정지할지 모르며 틀림없이 마지막이 존재한다. 난 그 필연적인 기다림을 겸허히 맞이하되, 조금이라도 더 편안히 삼키려 오늘도 부단히 죽음을 그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