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은새 Jul 14. 2024

그와 나

240714

어쩌면 나는 그 말이 모두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싫다는 말, 당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 당신이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 그 언어의 온도까지도. 온통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고 깎아내린 날 선 문장들, 그 모든 게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좋았다. 누나의 공항 해프닝만 빼면. 얼마만의 가족여행인가. 우리 가족은 한껏 들뜬 공항 공기를 폐 깊숙이까지 밀어 넣고 이륙장으로 향했다. 기내수하물 검색대에서 짐 검사를 마치고 우리 비행기가 이륙할 18번 게이트 앞 좌석에 앉았다. 통유리 앞 하늘은 파랬고 점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비행기와 공항 셔틀버스 사이를 유랑했다. 우리 차례다. 어라. 누나가 사색이 됐다. 원래 어깨에 있어야 할 가방이 없다. 안절부절못하던 누나는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고, 나는 혹시 몰라 짐 검사하는 검색대 직원에게 다가가 분실물이 있는지 물었다. 여기 있다. 익숙한 가방이었다. 겨우 게이트 시간을 맞춰 꼴등으로 기내에 탑승했다. 십 년 만의 가족여행,  첫째 날이었다.
 
둘째 날엔 렌터카를 빌린 뒤 줄곧 내가 운전하던 차를 아버지께 넘겼다. 나와 누나는 일 때문에 오늘 제주를 떠나야 했고, 부모님은 단둘이 일주일을 더 보내야 했다. 돈을 더 주더라도 조금 좋은 차를 예약하고자 했던 내 마음이 이렇게 다른 결과로 다가올 줄 몰랐다. 이번에 빌렸던 차량은 새로 나온 기종이라 기어가 핸들에 있었다. 아버지는 이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곧 위기가 닥쳤다. 신호를 잘못 보고 멈춰야 할 신호에 출발한 것이다. 나는 조수석에서 멈추라 크게 얘기했고 당황한 아버지는 차선을 물고 정지선을 넘어 차를 세웠다. 문제는 그곳이 다른 방향 차선 통행로였다. 측면에선 차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 어서 후진기어를 넣고 차를 뒤로 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신형차 기어 조작에 익숙하지 않던 아버지는 얼버무렸고, 나는 당황한 그의 손을 뿌리친 뒤 기어를 홱 낚아채 얼른 기어를 바꾸고 후진시켰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나는 왜 신호를 제대로 보지 않고 가냐고 다그쳤고, 이미 내가 손을 뿌리쳤던 행동에 속이 많이 상했던 아버지는 잘못 볼 수도 있지 않냐며 언성을 높였다. 싸움도 박수다. 이리저리 치는 손바닥이 잘 맞닿아야 한다. 몇 번의 손뼉이 오갔고 들불이었던 불꽃은 어느새 차를 집어삼킬 정도로 활활 타올랐다.
 
원래 좋지 않던 사이였으니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여태껏 말하면 다툼이 될까봐, 싸움이 될까봐 쉬쉬했던 모든 얘기들을 폭발하듯 터뜨렸다. 감정들은 "흥!"하고 풀어 돌돌 말아놓은 휴지 뭉치처럼 쌓여있었다. 그 감정의 휴지통을 제때 비워야 하는데 소통이 없는 우리 부자지간엔 그런 오해들을 풀 시간이 없으니 감정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이런 고집불통인 내 모습, 알량한 자존심을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당신을 보는 듯해서 치가 떨렸다. 내가 당신의 거울 같아서, 당신이 나의 거울 같아서.
 
"결국 모든 것은 괜찮아지나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적어도 내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피를 나눈 당신과도 이렇게 지내는데. 난 마음의 빗장을 다시 걸어 잠갔다. 우리의 대화는 상호 배려가 아닌 일방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다. 몇 번을 얘기해 봤지만 변화는 없다. 모든 것은 괜찮아지지 않고 다만 무뎌진다. 우리의 소원한 관계도, 당신과 나의 날카로운 기억들도 모두 희석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 바보처럼 얘길 꺼내보고, 다시 또 속고, 함께 늙어가겠지.

이전 08화 지우개를 든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