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운명이었다. 왜 그리 악착같이 떠나려 했는지, 구태여 포근한 잠자리를 포기하며 호스텔의 싸구려 매트리스에 몸을 뉘었는지, 개미집처럼 빽빽한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국경을 넘었는지, 이 행위들을 운명이 아니고선 설명하기 어렵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이 지독한 역마살은 이십 대의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정든 곳을 떠나라 재촉했다. 난 학교를 마치곤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영화관으로, 한식 공장으로 갔다. 패티와 고기를 뒤집고, 팝콘을 떠서 손님께 전달하며 머릿속으로 숫자를 셌다. 손님들이 건네받은 음식들은 곧 내가 다른 나라에서 건네받을 맛있는 식사가 될 거라고. 그렇게 현재의 노동을 미래의 여행으로 치환하니 일이 덜 힘들어졌다. 난 다람쥐가 겨우내 먹기 위한 식량을 모으듯 차곡차곡 통장에 돈을 쌓았다. 채비가 되면 어딘가로 떠날 수 있게. 다람쥐와 나의 차이는 다람쥐는 곡식을 저장했지만 난 모이는 족족 아낌없이 소비했다는 것이었다.
그땐 나도 여행이 처음이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어수룩하고 아쉬운 때가 많았다. 철없던 때에 너무 귀중한 경험을 해서, 과분한 기회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한다. 소꿉친구들과 순례길을 걷다가 예민해져 귀국 후 오히려 서로 소원해지고 데면데면해지기도 했고, 홀로 유럽의 아일랜드에 살며 반년이 넘는 시간을 한국인이 가득한 한인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보냈다. 지금이라면 좀 더 유연하고 따뜻하게 소꿉친구들을 대할 수도, 좀 더 현명하게 한인 레스토랑이 아닌 현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더 많은 문화와 언어를 경험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난 그때 그 시기를 충분히 소화하기엔 너무 어리석고, 거침없었고, 어렸다.
한편으론, 그때여서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그땐 내가 생각해도 거칠 게 없었다. 지금은 살면서 과속방지턱 같은 제동장치가 재깍재깍 작동하는데, 그땐 내 안의 모든 길이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였다. 난 언제든 욕심만큼 질주할 수 있었다. 얼마나 거침없었냐면 '국토 종주를 해보자'는 작은 문장만으로 친구에게 덜컥 자전거를 빌리고, 알바로 모은 돈으로 텐트와 자전거 가방을 구해 뒤에 싣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땐 '그냥 일단 해보자'라는 문장이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겨우 소화가 되어 행동으로 나오는 그 문장이 그땐 그저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존재했다. 오히려 이땐 액셀보다 브레이크를 밟는 게 더 어려웠고, 난 호기롭게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 뒤 예상치 못한 피로와 폭설을 경험하곤 패잔병처럼 부산으로 내려왔다. 겨우 자전거를 밟는 방법만 알던 내가 매일 수십 킬로를 주행했으니, 몸은 금세 만신창이가 됐다. 게다가 떠나던 때가 한겨울이었으니 살을 에는 추위에 얼마 안 가 머리카락엔 땀으로 만들어진 고드름이 생기기 일쑤였다. 자전거를 시외버스 짐칸에 싣고 부산에 내려오는 그 길, 뻥 뚫린 어둑한 새벽녘 고속도로를 멍하니 쳐다보며 눈가를 훔쳤다. 분해서 눈물이 났던 나는 터미널 앞에 세워진 낯익은 차 한 대를 보곤 허겁지겁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버지의 차였다. 철없이 걱정만 끼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없이 집으로 가자고 얘기했다. 그날 이불속은 무척 따뜻했다. 하지만 난 또다시 배낭을 메고 떠날 궁리를 했다.
지긋지긋할 만도 한데 내가 이렇게 계속 떠나려 했던 이유는 그곳에서밖에 볼 수 없는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과장 섞어 물을 마시더라도 달랐다. 바깥에서 마시는 물맛이 더 좋았다. 문화도, 언어도, 공기도, 의상도, 떠나면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멀어지는 순간들이 찾아왔고, 어리지만 당찬 소년은 그 순간들을 흠뻑 맞고 있었다. 떠나기 위한 계획, 준비, 절차들은 지난하고, 힘겹고, 피하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김없이 그것들은 모두 희석되고 역전됐다. 익숙한 곳에서 몇 달을 보내고 나면 다시 그 낯선 곳들이 그리워졌다. 안정은 내게 그다지 중요한 단어가 아니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여행을 갈구하는 순간이었다.
산란기가 되면 굳이 태어났던 곳으로 긴 여정을 떠나는 연어처럼, 태어난 뒤 본능적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세워 어미의 젖을 찾는 송아지처럼 내가 떠나는 데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저 떠남은 운명이었고, 난 그것을 따랐을 뿐이었다. 난 그렇게 강원도를 담고, 태국을 담고, 아일랜드를 담고, 우유니를, 마추픽추를, 스파이어를, 보고타를, 갈라파고스를 담았다. 선으로 된 그 길을 면면이 들여다보면 점처럼 박혀있는 순간들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재생된다. 아일랜드 밤거리를 걷다 길을 묻는 척을 하다 내 뺨에 키스하고 달아난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순간, 온 세상이 거울처럼 찬란히 빛나던 우유니에 서서 터질듯한 가슴을 붙잡고 경탄했던 순간, 보고타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던 순간에서 "펑!" 소리의 최루탄과 함께 인류애의 붕괴를 경험했던 순간, 푸른 바닷속 갈라파고스에서 조그만 펭귄이 옆구리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던 순간, 햇볕이 내리쬐는 순례자 길을 한참 걷다 그늘에서 배낭 속에 있던 납작 복숭아를 꺼내 대충 닦아 한입 베어 물던 순간, 그 순간들은 여전히 어제처럼 선명하다. 지금은 아득히 멀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는 예전의 내 모습이 지금의 나에겐 큰 위안이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이름이 적힌 추억 책 한 권이 내 삶에 존재하니까. 그리고 언제라도 떠나고자 하면 그때의 소년이 흔쾌히 나를 찾아와 줄 것만 같아서, 난 치열하게 떠났던 그 순간들을 한순간도 빠짐없이 아끼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