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지 수거 노인을 보면 마음이 영.
사회가 비대칭적이라고 듣고 안다.
마음 어두워지는 일이 눈 앞에 나타날 때가 있다.
잘 되는 사업은 엄청 잘 되는 것 같은 한편
‘임대 문의’ 광고가 붙은 건물을 보면
잘 안 된다는 거다.
1층에 공실난 상가, 사무실이 많은데 어찌 된 일인지.
그 공간을 사용하던 사업주와 임대인의 경제적 관계는 어떻게 됬을까.
사업은, 장사는 왜 잘 안 됐을까.
잘 됐으면 안 나갔지, 안 비어 있겠지.
보통 이 정도 생각하고 살던 날
폐지 수합하는 노인 분의 리어카를
도로에서 피해 지나갈 때였다.
또 마음이 안 좋은 거다.
저 분은 저렇게 해서 하루 얼마 버나.
침식(자고 먹기)은 어디서 하시나.
원래 뭐 하던 분이었을까
자식들은 있을까. 자식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등등
옆엣사람에게 나의 큰 혼잣말이 들어갔나 보다.
내가 “나도 저렇게 될까 겁난다.” 하니까
그러는 거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냐는 거다.
빈곤과 궁핍이 아이들의 시야를 가리고
어른은 조급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힘들다.
어느덧 우리 사회,
돈에 따른 층위를 매기는 게 당연시된다.
각자의 시간을 채워 가는데
모르겠다. 상위에서 하위를 내려다 보는 각도에선
뭐가 보이는지.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곤 한다.
갈수록 돈으로 즉각 환금할 수 없는 재화나
인간의 마음씨 같은 것들을
그게 뭐 중요하냔 식으로 여긴다.
기초노령연금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안 되어
리어카를 끌면서 폐지를 주워야 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있긴 할까.
나처럼 아직 그 연세가, 그 입장이 되지 않은 사람이
그저 안타까워 한다고
뭐 하나 달라지는 것은 없지.
격차가 9대 1이나 그 이상이라고
느껴지는 세상을 살면서
내 일이 아니라고 밀어내 봐도
눈에 들어오면
마음이 들썩이는
그런 일은 꼭 있다.
폐지 수거 노인들이 그 하나다.
어째야 돼.
https://www.peoplepower21.org/welfarenow/1926402
큰 일을 겪고 도저히 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나
할 때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
사람들은 알고 있다.
억울하면 안 된다,
그렇게는 못 살 것 같다
고민 고민하다가
서서한 시간이 다 정해 준다는 것을.
끌고 가는 것은
-모진 자책과 미련한 애정-이고
버리고 가는 것은
-끝내 되돌릴 수 없어서 내려놓는
추억과 한 줌 후회-다.
그 뒤로는 살아야 한다고,
살았으니까 살아야 한다고 해서
계속 가는 길이 되겠다.
거기엔 고난도 없겠지만 만족도 없다.
늘 그게 그거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빼 버리면
맥을 놓은 그의 남은 날들은
그밥에 그나물 같은 거랄까.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들은 알지도 못한다.
차 핸들을 살짝 우로 비틀었다.
차창 앞 도로에는 죽은 새 한 마리가 있고
그 새에게
닮은 새 한 마리가 내려와
부리를 대어 보는 찰나였다.
뒷차가 위험하다고 경적 소리를 내는데
다른 이유에서 마음이 두근거린다.
새들이 동료를 찾기도 하나?
괴연 도시에서 날개 달린 새가 왜 죽었을까
오지라퍼는 궁금해진 끝에
‘유리창 충돌’에 대해 알게 된다.
https://m.ecomedia.co.kr/news/newsview.php?ncode=1065600526209668
사람은? 옆엣사람이 분명히 아픈 걸 알아도
다 주검처럼 되어도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이 다칠 일도 없고
감수해야 할 위험도 당장 크지 않은데
그래도 남을 위해서는 굳이,
- 설령 그사람이 죽은 자처럼 숨을 못 쉬더라도 -
인간은 끈 떨어진 연의 끈을
애써 다시 달아주지 않는다
외면하는 게 편하고
잠시 불편함은 오래 가지 않기에
나만 아니면 괜찮기에
눈 질끈 감고 피하면
시간이 가게 되어 있고
망자는 다시 숨쉬지 않는다.
승자은 기억되고 패자는 지워진다.
그게 인간이고
우리가 다니는 직장이란 데다.
자신들과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내 어떤 아픔도 힘듦도 모욕도
이해되거나 와 닿지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편이 갈릴 때, 층이 나뉠 때
똑같이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사람이란들
그가 자기랑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버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