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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Mar 10. 2024

22. 나는 사람을 믿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


후유증



건강을 훼손하고 지나간 왕따 사건은

나만 알 수 있는 ‘마음의 그늘’을 만들었다.


자신감까지 잃진 않았더라도

남들 앞에 나서는 게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지난 세월 기본적인 예의마저 지키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쓸고닦고 헌신해 온 나는

앞으론, 더이상, 반복해서,

누군가가 입을 비쭉이게 하지 않으려고

강력한 자기 검열을 한다.


‘언제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어’,

그들이 만들어 낸 소문이

발없는 말이 되어 달려올까 봐

전전긍긍은 아니어도

가능성 충분히 열어놓고 생활한다.


지금 나의 일과는


재개한 직장 생활,

건강 해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

(식사 잘 하고 운동하고 잘 자려고)

가족들과 때때로 행복한 시간을 갖는 일,

브런치에 글 발행 위해 이렇게 쓰는 일


로 채워져 있다.


거기에 단 하나,


내게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 사람들이 어느날 돌아서는 일을 당하면

안된다고 되새기는 일

나의 마음에 명백한 그늘을 드리운다.


인생에서 소외된’(‘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인생에서 쫓겨난 기분이었다.’ 122쪽) 사람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제도 밖’일 것이고

자신의 인생 2막이 될 것이다.


일만 했던 나, 직장에 있는 시간이

매 출근일 12시간이었던 나는 과거의 ‘나’다.

현재 ‘나’는 과거를 기준으로 보면 ‘놀고 있‘다.


일을 다시 하게 된단 생각만으로도

엄두가 나지 않고 머리가 지근지근 아플 것 같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비틀린 상호작용’이었고

어차피 남들은 내가 아픈 것이

그저 ‘꾀병’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 있다.

아파 본 사람이나

아픔의 크기를 아는 것이려니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수치심 같은 것이 첫째인데,

자기 일은 스무살부터는 묻지 않고 해 온

책임감 강한 내가

인생의 향방을 달리 한 결정을  ‘남들 손에 ‘놀아난‘

결과로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하나요,


둘째는 진정으로 사람을 좋아했던 유형으로서

사람이 준 상처가 깊다 보니

인간의 내면을 절대 모른다는 두려움,

배신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는 불안으로

사람을 다시 믿게 될 수 없을 것으로 인해서

끌어안는 ‘외로움’이다.






아프니까 외롭다.



병이 다 나은 것 같아도

늘 조심한다는 의미에서,

상비약을 챙겨 다니는 지금은 후유증 중이다.


즐거운 순간이 꿈처럼 깨져 버렸을 때

모두가 나를 향해 서 있다

순식간 등을 보이고 돌아섰을 때

그 충격은 파장이 컸다.


알 수 없다.


아프니까 외로운 건지


외로워서 아픈 건지


내가 아픈 것은 ‘자초한’ 것이 아니냐 라고 했던

‘도전자’의 말을 여러 번 떠올렸다.


대충대충 하고, 모르는 척 하면서, 허허실실

‘부작위’를 싫어하지 말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시간만 보냈더라면

나의 위치,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자리’는

달라졌거나 최소한 지켰을 것 같다.


과연 그렇게 하지 못한 내 잘못(my fault)

이라고 생각하려면

나는 다른사람들과 똑같은,

차별점 하나 없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되지 않는 생각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책한다는 건

병이 낫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내 잘못과 내 착오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따돌림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잘 풀리는 것 같아서

아니면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고 있지 않겠다는

‘시기와 질투’의 대연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으면

나는 ‘사랑’이라고 할 것 같다.

최후의 기쁨과 만족 때문에 난관을 이기는 사랑.

‘일‘도 사랑했고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 ’‘도 사랑했다.

그리고 이제 그 ‘일’을 할 수 없게 된 거다.

후유증 때문에.





어떡하면 좋을까



일은 글러먹었다. 일을 하면 아플 것 같다.

그럼 어떡하면 좋은지

아픈 기간 동안 인생 2막을 생각해 봤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 했다.

답이 과연 있었다.


복귀한 후 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들 무리를 보면 보는 대로 메스꺼움이 일었다.

사는둥마는둥 명만 이어 나왔다.

사는 게 아니었다.


무엇이든 찾아야 한다면

예전처럼 ‘일하는 나’가 아니어도

다른 일 하는 나‘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오래 매달리다가

찾지 못했다.


알콜 중독자가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를 늘어놓고

매일 마시듯이


나는 변명하고 있다.

일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까딱하면 이번엔 정말 죽을 수도 있는데 하는

두려움을 안고


무엇을 할 것인가 자체를 생각하길

포기하고 지낸다.


찾고 생각하고 만들면

누가 와서 박살낼 것 같은 두려움?


역시나 후유증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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