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Apr 10. 2024

31. 용서하는 자는 있고

- 용서를 구하는 자는 없는 이치.


인사에도 타이밍’이란 게 있나 보다.


어제 식사후 양치를 하던 중

같은 직장 사원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내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는 밀폐된 공간,

볼일을 마칠 때까지 각자의 세면기만

들여다 본다는 게

나와 같이 따돌림 경험을 가진 사람에겐

특별하게 숨막힌 일이란 것을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할 걸, 놓쳤네’

‘지금이라도 할까? “안녕하세요”면 될까?’

‘눈길도 안 하는데 다음에 봐서 할까?’

그리고 급기야

‘전 직장에서 무슨 소문을 냈나,

아니면 이사람이 나를 왜 싫어하겠어?‘


여기까지 미치자 머리가 살짝 아파 왔고

‘에라이 내가 먼저 나가자’라고

나오게 됐다.


나라고 사람 상대의 텐션이 늘 똑같지는 않다.

더구나 무슨 부서의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에 대해선 현재 아무 소스도 없다.

알아도 조심, 모르면 더 조심 한다.

나는 사람한테 물려 본 사람이니까.





용서는 내가 해야 하는데

- 영화 “밀양”(2007)



아들을 잃은 영화 속 배우 전도연.

2019년 “전도연 마스터피스 특별전“ 재개봉 포스터


“밀양”을 본 이후로 난

연기 잘 하는 사람’이라 하면 그녀를 떠올렸다.


살인범을 찾아가 듣게 된 말(“하나님께서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로 인해

그나마 가진 평정을 다시 잃게 된

영화 속 전도연. 아, 나라면

‘돌아 버렸을’ 것 같았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용서하여야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는지?

그보단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과장도 그랬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생각한다면

용서하고 용서받고 치유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내 인생에 개입한 죄



자신의 할 일을 잘 하고

다른 사람이 잘 하는 일을 응원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문제는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할일을 모르거나, 못 하거나, 둘 다이거나.

그런데 시험은 통과했고 공무원증을 받았고

그 ‘증(쯩)‘이 바래도록

일을 하는 데는 마음이 없고

콩밭에 마음이 다 가 있다.

우선 월급이 적다 하고서

월급 받은 만큼도 일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이 늘지 않았다.


그리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왈가왈부하는 데 맛을 들여 버렸다.

그런 건 원래의 업무분장엔 없는 사항인데도

무척 열심히들 한다.


그 사람의 진로를 방해하고

심사에 떨어뜨려서 낙심하고 있으면

자기들끼리 쑥덕인다.

저거 보라고.

뱁새가 황새 될라고 했다고.


내가 겪고 본 일들만 해도 수두륵하니 많다.

자기 삶이란

흘러흘러 무사히 퇴직 시기만 맞으면 되는,

별 일 아니고 그저 예사로울 뿐이고


남의 일에 입방아란 끝날 줄 모른다.

들어보면 자기 자랑이기도 하고 딱히 아닌 것도 같다.


“내가 누구의 누구를 잘 알고

과거에 내가 누구랑 같이 근무했는데

그사람은 승진한 후에도 자기에겐 깎듯이 대했으며

내가 여기 있으려고 있는 건 아니며

기관장이 자신에게 은근하게 기대는 중“이란다.


허세자기최면의 랠리로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이십 년이 가고 삼십 년도 묵은 사람들이

여기 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단 한 가지,

자기 죄이다.

“나와 같은 사람의 삶에

난입하고 끼어든 죄.“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 살아도

형법상의 죄가 성립하는데

남의 시간, 남 인생에 끼어들어

향방을 돌려버린 죗값은 얼마일까?





나도 그들을 이용했다.



생각해 봤다.

내가 왜 그들이 바란 것처럼

영영 쓰러져 죽어 버리지 않았을까.


혹시 내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 이것을 ‘진정’이라고 한다면-

진정하게, 무조건하게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일 잘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나는 책임감 강하고

자신을 외적으로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을 선호했다.

그래서 과장을 처음 봤을 때부터 ‘별로’라고 생각했다.


늘 사람들에게 ‘그럴 수 있지’라고 하고

과장에게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라고 할 때

나는 알고 있었다.

과장이 앉아 있기 싫어서 나가는 걸,

읹아 있다가 사람들이 찾는 게 무서웠던 걸.


그리고 사람들이 내가 아무리 친절하고 배려한들

돌아서서 욕할 거라는 것도 알있다.


그렇담 나의 처신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의 평판을 한번쯤은 쓸 데가 있으리

생각을 나도 해 봤다.

아니, 하고 있었을 거다.

즉 ‘언젠가 부탁을 한다면

한번은 들어주겠지‘라고 내심 딱 쟀다.

속설엔 ‘기브앤테이크’를 뛰어넘는 건 없다고 했지.

나도 사람이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 좋은 연 했지만

나도 계산하고 있었던 거다.

물론 내 인생 모든 의 성과가

과장 같은 사람들의 계산식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용서해 주세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 사람들을 정녕 좋아해서 잘 해 준 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의 말이 ‘잘‘ 나오길 바랬습니다.

‘큰 아들/딸 콤플렉스’도 있어서 인정받기 원하고

눈치를 많이 봤거든요.


(네 죄를 사하노니...)


저는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알았지만

이렇게 용서 다 해 주시기는 없기에요

저는 많이 아팠고

보란 듯이 짓밟혀 주고 나왔어요

이제라도 과장이 찾아오면

용서하시지 말아 주세요.


저한테 용서 받으라고 해 주세요.


(걱정 마라.

그 놈팽이가 우리에게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너는 잊혀졌다.)




작가의 이전글 30. 벼락 맞으면 좋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