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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Apr 14. 2024

32.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하지

- ‘의리’다 뭐다 하지 말기.


불편한 절약보다 ‘익숙한 채무’라고 했다

행복한 삶을 담보하기 위한 자기 변화는

길목 길목마다 복병이 많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더러, 꽃을 보면서

떠오르는 아주 슬픈 기억들도 그 하나다.





아마존되다to be amazoned



‘구조 전환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제언도 여러 번 해 봤지만

비전을 갖지 못한 리더십를

넘어설 수 있는 아무 재간이 없었다, 내겐.

차라리 ‘다수’이기라도 하든가.


패거리에 한번 들어가면 비용이 많이 절약된다.

그리고 심간이 편안하다. 

패거리의 무게가

개인의 부실과 과오를 지그시 눌러 준다.


나 같은 사람 하나가 그 중 누군가를 상대해야 한다면

패거리가 몰려 올 거란 걸 알아야 한다.

미세한 생각 차이를 덮고 너도나도

패거리에 몸을 담그는 이유일 테다.

‘긱(gig)’인 단기 고용직들조차도

이 ‘바람’을 탔으니까.


규칙을 설정해 놓으면 된다고 할 테지만

다수’가  이름도 다양한 ‘위원회’ 같은 델 장악한 후

주관적인 호불호, 경험, 불평불만을 담아

차례로 뜯어고쳐서 딴판으로 개조해 버린다.


여기에 베이스(집념, 애착, 결단력)가 얕고

인사이트가 없는 리더가

여러 기관을 거치고 돌다가 낯선 기관에 내려오면

이들에게 이용당하기 딱 쉽다.


이렇게 ‘아마존’이 되는 것이다.





‘의리’는 한 사람에게만 소중했지....



“의리 좋아하는 사람이 잘 되는 거 못 봤는데”라고

말한 누군가와 나는 한때 가깝게 지냈다.

돌아가는 일도 의논 겸 자리를 같이 하다보니

일정 정도 개인사도 나누고 친밀했지만,

결국 ‘한 순간’을 넘기지 못했다.

모든 게 보란 듯이 뒤집혔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 의리도 좋아하지 않았고

‘의리’가. 없.었.다.


다수’를 좇을 뿐

‘이래도 되는 건가 ?’라는 방면으로는

일제히 함구해 버리는 사회에서

성숙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서

나는 거의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I'가 왔다.

그는 ‘의리를 지켜야제’라고 했다.

나는 ‘I'의 방향이 조금만 보완하면

나이스한 성공 사례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지지했다.


 ‘I'에게 먼저 시련이 왔고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홍해 바다처럼 갈라졌다.

나는  ‘I'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내 시간을 잊었다.


당연히  ‘I'가 지키고 있던 사업은

썰물에 끌려내려가고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다.

먹잇감이란 듯 덩치 큰 예산과 이름값은

반대파들이 가져가서 입맛대로 뜯어갔다.


칸막이는 더 높아졌고 들어갈 틈은 안 보였다.

 ‘I'가 빠진 틈을 타고 새로 생긴

‘이너서클은 곧 빗장이 내려졌다.’


나는?


모든일은 막상 하려고 들면 어려운 법이다.

‘도와 주지 않는 것’ 자체가 ‘방해하는 것’이었다.


 ‘I'가 빠지자 리스크가 너무 커졌지만

아무도 거기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이야기에서처럼

내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다 망하라’,  차라리.



분명 난센스인데

“이게 말이 되냐 ?” 해도 다들 무덤덤했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옆을 신경 쓰지 않았다.

더욱 안 좋은 일은,

향후라도 수준이 좋아질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수적 the essentials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런 채로 돌아갔고

모두가 하루만큼의 일을 해 놓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매일이 똑같았다.

미스매칭은 발생 즉시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게 아예 불가능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기존의 공들인 사업은

피봇(Pivot)은 커녕

말살되었고

나의 존재는 부끄럽게 되었다.


‘다수’에게만 재미있는 비열한 세상!


작은일부터 한사람 한사람 전문성을 갖추고

한 방향으로 노력을 경주한다면, 그래서

‘새로운 형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했다면.

진짜 랭킹 모델을 창출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은


‘은밀하고 조용하게  

모두 결탁된 ‘ ’다수’에 의해

전부 신기루가 되었다.


그 때 ‘I'가 컴백했다.


엉큼한 조무래기’들에 의해 조롱을 당해

‘구이 신세가 된 개구리’ 상태의 나를

‘I'는 다시 찾지 않았다.


자신의 공백을 버티며 내가

할 수 있는 맥시멈을 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러나 ‘I'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것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 그런 여유가 남아 있었는지

혼자 되뇌었다. ‘그럴 수 있지.’라고.


‘의리’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의리가 슬픈 이유

여기에 있다.


대체로 그놈의 ‘의리’란 것은

한 사람만이 지키기 때문이다.

더 약한 자가.


더욱 집념을 내지 못하고

보다 더 용기가 필요했는데 ‘I'가 주저할 때


나는 더 약하면서도


‘의리를 지켜야지’라고

굳세게 주먹을 쥐었기 때문이다.


하고 보니 ‘슬픈 이야기’이다.




‘I'가 없는 동안

모빙(mobbing :

직장에서의 정신적 테러, 집단적 왕따) 당해

‘알아서 사표를 쓰게끔’ 몰릴 정도로

무력감, 모욕감에 시달린 내가


‘스스로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나 어떻게

직장 내에서 해소해 볼까 하는

열 살 정도의 정신 연령자들에게서 보다,


‘세상 초탈한 척’ 하면서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부은

과장이나 ‘G’들에게서 보다,



나 자신에 관한 비정상적인 감정들에

사로잡히게 되고

회복력이 떨어져야 했던 이유는


바로


쉽게 배신하고

금방 새로 맺어졌을 사람들 때문이었다.


통증이 정말 심할 때는,

‘사람이 동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도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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